덤으로 받은 삶

“니는 지발 엄마맨치로 땅 파먹고 살지 말거레이.” 오늘도 비지땀을 흘리며 끝이 보이지 않는 밭고랑에서 잡초를 뽑고 있는 나에게 어머니는 채근을 하신다. 힘든 농사일에 지치신 어머니는 자식들에게만큼은 이 삶을 물려주고 싶지 않으셨다. 당신의 평생 꿈은, 자식들이 번듯한 직장을 가지고 도시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었다. “니는 커서 뭐가 되고 싶노?”  “내요, 지는 무공을 익혀 하늘을 날아다니는 사람이 될낌미더.” 어머니는 잠시 말을 잃으셨지만, 내 꿈은 정해져 있었다.

기억 속의 어머니는 밤에도 쉬지 않고 일을 하셨다. 매운 고추를 씹어가며 잠을 쫓고, 부업으로 홀치기를 하셨다. 머슴이 넷이나 있는 부농의 안주인이셨지만, 여유가 있는 날이면 동네 품앗이도 마다 않으셨다. 오로지 자식들에게 농사일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일념 하나로, 여덟 형제들을 모두 도시로 유학을 보냈다. 나는 10형제 중 아홉째로 태어나 중학교까지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날이 좋은 날만 골라서 한 달에 열 번쯤 비정기적으로 버스가 들어오는 하늘 아래 끝 동네, 전기가 국민학교 5학년 때 처음 들어온 깡촌이 고향이다.‘새벽종이 울렸네’로 시작되는 새마을 노래가 아침을 깨우던 시절이었다.

글자를 익히고 형들이 두고 간 빛바랜 무협지를 읽게 되었고, 그때부터 나는 꿈이 생겼다. 1갑자 이상의 공력을 쌓으면 하늘을 날 수 있다는 무협지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믿었고, 그렇게 하늘을 나는 무공을 익혀 마음껏 날겠다는 꿈을 품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나의 어린 시절은 엉뚱하지만 동화 같은 삶이었다. 푸른 하늘, 넓은 들판, 작은 개울. 그 속에서 인간도 동물도 식물도 모두 하나의 존재였고, 나 또한 그 일부였다.

나는 그런 시골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농사일을 도우며 매일 새참을 나르고 소를 돌보며 살았다. 특히 소를 관리하는 일은 나의 전담이었다. 우리 집 소는 나보다 더 농사일을 잘 알고, 스스로 밭을 갈고 길을 찾아 집으로 돌아올 줄 아는, 우리 집에서 제일 보물같은 존재였다. 학교를 마치면 나는 늘 누렁이의 등에 올라타고 꼴을 베러 갔다. 어디로 가자고 말하지 않아도 누렁이는 나를 태우고 귀신처럼 나의 생각을 알아채고 목적지를 향해 거침없이 간다. 내가 떨어질까 조심하며 위험이 닥쳐도 자기보다 나를 먼저 보호해주던 존재. 그 누렁이는 우리 집의 머슴들보다 더 의리 있고 똑똑한 나의 가족이었다. 나는 그런 누렁이를 보면서 다짐했었다. ‘나도 저렇게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되어야지.’ 누렁이를 풀어놓고 나는 혼자 무공을 익혔다. 무협지 속 동작을 따라 하며 하늘을 나는 날을 꿈꿨다. 그러다 지치면 그림을 그렸다. 흙 위에도, 나무 위에도, 비료 포대기에도, 심지어 허공에도 그림을 그렸다. 그림은 언제나 나를 편안하게 해주었다.

중학교에 진학해서도 무공에 대한 나의 집념은 달라지지 않았다. 영화배우 ‘박노식’은 나의 우상이었고, 영화 속의 장면은 내가 꿈꾸는 세상이었다. 하지만 학교에는 무공을 가르치는 과목은 없어서 미술부에 들어갔다. 미술 선생님은 나에게 또 다른 세상을 열어주셨다. 경주 계림 숲에서 선생님과 함께 그림 캠프에 참여하여 울창한 숲을 그리던 경험은 내 삶에서 새롭고 신비한 세계였다. 중학교 시절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삶은 갑자기 거칠어졌다. 어머니,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셨다. 나는 어린 동생과 둘이서 도시에서 살게 되었다. 학교가 끝나면 리어카를 밀며 쥐포를 팔았다. 학비와 방세를 직접 마련해야 했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버텨야 했다. 그럼에도 나는 공부를 열심해 했고, 무공을 익히고, 그림을 그리는 일도 포기하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믿고 있었다. 언젠가는 하늘을 날 수 있을 거라고.

교사가 된 후에도 그 꿈은 변하지 않았다. “선생님은 꿈이 뭐예요?” “내 꿈? 하늘을 나는 거야.” 아이들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나는 내 꿈이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아무리 노력해도 하늘을 날 수는 없었다. 할 수 없이 그림을 그리며 위안을 받고 살았다. 그러다 2000년, 일본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게 되었다. 바쁜 삶 속에서 무공도 그림도 잠시 잊을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지내다보니 훌쩍 2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고, 교직 생활도 40년을 넘겼다.

2021년, 코로나에 걸리면 마녀사냥을 하신 시기에 감염이 되었다. 입원조차 하지 못하고 집에서 격리되어 버텨야 했다. 2주간의 격리에도 회복하지 못하고 결국 병원으로 실려갔다. “길면 3일입니다.” 의사의 죽음을 선고받은 순간, 내 머릿속에는 ‘왜 내가!’ ‘나보다 더 나쁜 사람도 많던데!’ ‘안 되는데! 아직 해야할 일이 많이 남았는데’ 그러나 의사가 죽는다면 죽을 수 밖에, 회복은 불가능하다고 못박았다. 그래도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답답함 속에 하루가 지나고 많은 생각 속에 결국 삶을 포기하게 되었다. 죽음을 받아들이자 오히려 모든 것이 편안해지고 마음이 평온해졌다. 잠도 잘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났다. 나는 살아났다. 의사가 말했다. ‘의학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기적입니다’ 나는 21일 만에 퇴원을 하게 되었다. 다시 일터로 나갔다. 더 열심히 일했다. 그러나 무리한 탓인지 다시 쓰러졌고, 또 한 번 죽음을 선고받았다. “올해를 넘기기 어렵습니다.” 의사가 이번에는 암 진단을 내렸다. 고통스러운 치료가 이어졌다. 머리카락이 빠지고 손톱과 발톱이 무너지는 시간 속에서도 나는 버텼다. 

지금 나는 또 한 번의 기적 속에 삶을 이어가고 있다. 여전히 하늘을 날고 싶은 꿈도 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림도 그린다. 이제는 안다. 꿈은 이루었을 때보다 꿈 꿀 때가 더 행복하다고. 어릴 적 나를 태우고 들판을 함께 달리던 누렁이처럼 나도 누군가에게 따뜻한 존재가 되고 싶은 꿈을 꾸며 하루 하루를 살고 있다. 그리고 오늘도 나는 붓을 든다. 그리고 내일도 붓을 들 것이다. 하늘을 나는 꿈과 함께, 세상을 따뜻하게 하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꿈을 꾸며.

댓글 남기기

EduKorea News에서 더 알아보기

지금 구독하여 계속 읽고 전체 아카이브에 액세스하세요.

계속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