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선생님은 벌을 받겠다고 하셨다
“야! 패스, 패스! 저쪽이 비었잖아!”. “9번이 6번을 막아야지!”. 아직 오전이지만 여름 땡볕은 이미 한낮처럼 뜨겁다. 먼지가 풀풀 날리는 시골 국민학교 운동장에서 아이들은 숨이 가쁜 줄도 모르고 핸드볼 연습에 열중이다. 그때는 몰랐다. 그 여름이 내 인생에서 가장 뜨거운 기억으로 남게 될 줄을. 6학년 때, 도시에서 멋진 선생님이 우리 학교로 부임해 오셨다. 돼지 오줌통으로 축구를 하던 우리에게, 선생님은 처음으로 ‘제대로 된 공’을 우리에게 쥐여 주셨다. 핸드볼을 가르쳐 주셨고, 스카우트 활동을 알려 주셨다. 시골 작은 학교엔 운동부 예산 같은 건 없었다. 대신 선생님의 주머니가 있었다. 간식도, 활동비도, 늘 선생님 몫이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아무 말 없이 받아먹기만 했다. 그게 얼마나 큰 사랑이었는지, 그땐 몰랐다.
늦여름 어느 날, 선생님은 손님이 왔다며 오후 훈련을 자율에 맡기셨다. 자율 훈련이란 왕복 30킬로미터 달리기였다. 반환점을 돌아오는 길, 우리에게 뽕나무밭이 나타났다. 시골 아이들에게 오디는 금지된 유혹이었다. 한 알, 두 알. 달콤한 맛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정신을 차려보니 오후 5시. 헐레벌떡 학교로 돌아왔을 때, 선생님은 교문 앞에 서 계셨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다만 우리를 가만히 바라만 보셨다. 입가에 묻은 보라색 흔적이 모든 걸 말해 주고 있었다. “주장, 회초리 가져와라.” 선생님은 체육복 바지를 무릎까지 걷어 올리셨다. “내가 너희들을 잘못 가르쳤구나. 내가 벌을 받겠다. 주장, 때려라!” 귀를 의심했다. 그러나 선생님은 진심이셨다. 주장이었던 나는 회초리를 든 채 울기만 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때, 멀리서 소사 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생님, 손님 갑니다요!” 그 말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무릎 꿇고 반성하라는 말만 남기고 돌아서셨다.
그날 이후 우리는 선생님을 진심으로 따르게 되었다. 연습은 더 치열해졌고, 방학 때는 학교에서 합숙 훈련도 했다. 친구들과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잠드는 모든 순간이 내 생애 첫 경험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선생님은 우리를 강너머 수박밭으로 데려가셨다. 웃통을 벗고 온몸에 진흙을 바르며 몰래 수박을 따던 그 긴장감. 강물 속에서 수박을 깨뜨려 먹던 그 달콤함. 나중에야 알았다. 선생님은 미리 주인의 허락을 받아 두셨다는 것을. 우리는 속았지만, 그 속임 속에는 우리들을 즐겁게 해 주려는 사랑이 있었다.

세월이 흘러, 1983년 나는 교사가 되었다. 아이들과 야영을 하고, 시골 학교를 찾아다니며 아이들과 캠프를 즐겼다. 지금 생각하면 무모할 정도로 아이들 곁에 가까이 있었던 애송이 교사 시절이다. 그러다 교직을 떠났고, 다시 돌아왔고, 또 다른 학교에서 6학년 담임을 맡았다. 그 학교는 사립학교로 성적과 순위가 전부인 전쟁터 같은 곳이었다. 아이들과 나는 서로를 믿지 못했다. 스승의 날조차 점수 이야기만 오갔다. 그날, 나는 참아왔던 무언가가 무너졌다. “반장, 앞으로 나와! 아무래도 내가 너희들을 잘못 가르친 모양이다! 내가 벌을 받으마!” 나는 몽둥이를 반장에게 쥐어 주고 바지를 걷어 올렸다. 어릴 적, 나의 선생님이 하셨던 그 말 그대로 했다. “반장, 때려라!” ‘쩔썩!’ 몽둥이가 날아왔다. 한 대, 두 대… 일곱 대. 반장은 울지도 않았다. 다 때리곤 덤덤하게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나는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지금 이 모습이 우리 반 아이들의 진심이라는 것을 느끼며.
다음 날, 도저히 그대로는 지나갈 수가 없었다. 나는 걸상을 들고 교탁 앞에서 벌을 섰다. 10분, 20분, 30분. 땀이 쏟아지고 눈앞이 흐려졌다. 처음에 못본체 하던 아이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선생님! 잘못했어요!” 키가 유난히 작아 항상 앞에 앉아 나를 쳐다보던 아이가 달려 나왔다. 이곳 저곳에서 울음이 터져 나왔다. 반장이 눈물을 흘리며 나와서 내 손의 걸상을 내렸다.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선생님!” 그 순간, 나는 정신이 흐릿해져 쓰러졌다. 눈을 떴을 땐 병원이었고, 아이들이 걱정스러운 모습으로 주변에 서 있었다. 그 뒤 우리 반은 달라졌다. 믿음이 생겼다. 서로의 아픔을 먼저 챙겨주는 교실이 되었다. 그해, 중학교 입시에서 우리 반 아이들은 놀라운 성과를 냈다. 시내 여러 곳의 교문에 우리 반 아이들의 이름이 수석 합격이라는 프랑카드가 걸렸다. 그것보다 더 값진 것은, 서로를 믿는 법을 배웠다는 사실이다. 그 뒤 우리들은 졸업 여행으로 동해안 팬션을 빌려 2박 3일 동안이나 추억을 만들었다. 나는 지금도 일본 도쿄에서 선생으로 살고 있다. 스승의 날이면 제자들에게서 연락이 온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날, 벌을 서며 걸상을 들고 있던 사람은 아이들을 가르친 교사가 아니라 아이들에게서 믿음을 배운 한 인간이었다는 것을. 교육은 지식을 전하는 일이 아니다. 믿음을 건네는 일이다. 그리고 그 믿음은, 때로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는 힘을 가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