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을 맞아 모처럼 서울역을 찾았다. 보슬비가 잔잔히 내리던 광장에서 나는 오래도록 잊지 못할 장면을 보게 되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老) 스승 앞에 중년의 신사 여럿이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리고 있는 보습이다. 의례도, 형식도 없다. 오직 세월 속에 차곡차곡 쌓아온 존경과 감사만이 담긴 큰 절을 드리고 있다.
당시 나는 교사 초년생이었는데, ‘어떻게 가르치면 저런 제자들을 남길 수 있을까?’, ‘어떻게 교직 생활을 하면 저렇게 존경받는 스승이 될 수 있을까.’ 부러움으로 가슴이 먹먹해 옴을 느끼며 마음이 무거워졌다. 세월이 흘러 ‘스승’이라는 말의 무게가 예전 같지 않지만, ‘스승의 날’이면 나는 제자들을 떠올려본다. 그리고 오래된 앨범을 꺼낸다. 어느덧 마흔 권을 넘긴 앨범 속에는 내 교직 인생과 함께 아이들의 시간들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수많은 얼굴들 사이에 유난히 떠오르는 아이가 있다.
40년 전, 교직 초년 시절 내가 근무하던 학교는 대도시지만 시골의 정서를 간직한 변두리 작은 국민학교였다. 어느 날 수학 시간, 연필 긁는 소리만 들리던 교실의 고요를 깨며 한 아이가 외쳤다. “선생님, 경아가 아파요!” 일제히 시선이 한곳으로 모인 가운데 책상에 엎드린 경아가 힘겹게 고개를 든다. 눈에는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한 눈물이 가득 고여 있다. 배를 부여잡은 모습이 심상치 않아 급히 반장을 딸려 양호실로 보냈는데 잠시 후 복도에서 토했다는 소리와 함께 소란이 일어났다. 아이들은 얼굴을 찡그리며 코를 막았고, 나 역시 순간 당황하여 선뜻 나서지 못했다. 그때였다. 말 없이 교실을 나서는 한 아이가 있다. 윤주였다. 윤주는 세숫대야와 빗자루, 쓰레받기를 들고 뒷문으로 조용히 나가 토사물을 치웠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얼굴 하나 찌푸리지 않고 묵묵히 주변을 정리한다. 나는 그 모습을 그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짧은 순간 많은 생각이 들었다. ‘어린아이가 어떻게….’
말없이 힘든 일을 스스로 감당하던 윤주의 모습에서 그날 나는 천사를 보았다. 그리고 사랑이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이라는 것을 배웠다. 윤주는 고아원에서 생활하던 아이다. 당시 내가 담임하던 6학년 아이들 가운데는 30% 정도가 고아원 아이들이고 나이도 정확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윤주는 특히 어려 보였다. 마치 3학년 아이가 6학년 교실에 앉아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윤주의 학교생활은 늘 천사 같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나를 정말 힘들게 하던 말썽꾸러기 중 한 명이다. 오락실에 가려고 공중전화기를 부수다 자주 파출소에 잡혀가기도 하고, 내가 잠시 등을 돌린 사이 교실을 빠져나가 사라지기 일쑤였다. 공부와는 담을 쌓았고 어른들의 말은 귀에 담지 않았다. 미래를 꿈꾸기에는 지금의 삶이 너무 버겁고 지친 아이였었다.

어느 날, 서울 김포공항에서 전화가 왔다. ‘윤주’라는 아이를 아느냐고. 담임인 나는 공항까지 가서 윤주를 데리고 왔다. “윤주야, 공항엔 왜 갔노?” “엄마 찾을라꼬요.” “엄마? 엄마가 공항에서 일하시나?” “아니요. 미국에요.” 고아원에서 자주 엄마를 찾는 윤주에게 원장은 미국에 돈 벌러 가셨다고 말한 것이다. 어린 윤주는 그 말을 믿고, 엄마를 기다리다 지쳐 동전 몇 개를 모아 직접 엄마를 찾으러 나선 것이다. 동전을 내밀며 미국행 비행기 표를 달라고 했다는 공항 직원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아무 꾸중도 할 수가 없었다. 흔들리는 버스 안, 어깨에 기대 잠든 윤주의 얼굴은 세상 근심 없는 천사 같은 모습이다. 그날 이후 나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담임으로 있는 동안만이라도 이 아이를 내가 지켜주겠다고. 신혼이었지만 아내는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렇게 6월의 어느 날, 우리 집에는 식구가 늘었다. 도시지만 시골 같은 마당에 토끼와 개, 고양이, 오리와 닭이 살았고, 텃밭에는 온갖 채소가 자라던 대도시 속의 작은 시골집. 그곳에서 윤주를 포함해 아들과 우리 네 식구가 함께 살게 된 것이다. 나는 윤주를 고치거나 가르치려고 하지 않았다. 간섭하지도 않았다. 대신 끝까지 믿어주었고,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만 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윤주는 스스로 변해갔다.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늘었고, 친구를 위해 앞장서는 모습도 보였다. 물론 가끔 파출소에 다녀오는 일도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하루하루 달라지는 윤주의 모습은 나에게 큰 선물이었다.
국민(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윤주는 내 호적에 오르지 못한 채 다른 지역으로 떠났고 연락이 끊겨버렸다. 그리고 서로가 의식하지 못하고 오랜 세월이 흘러버렸다. 어느 날, 어른이 되어 수녀가 된 윤주가 스승의 날이라고 나를 찾았다. 지금도 스승의 날이 되면 어김없이 연락을 해온다. 그러고는 묻는다. “요즘, 존경받는 스승으로 지내고 계세요?” “아이들을 정성으로 섬기며 생활하나요?” 행동으로 사랑을 가르쳐 준 나의 천사, 윤주. 나는 윤주의 스승이었다기보다, 내가 윤주의 제자였다. 사랑의 의미를 내게 가르쳐 준, 내 인생의 진짜 선생님이다. 이제 1년을 남겨 둔 정년퇴직을 준비하는 오늘, 나는 43년의 교직 생활을 돌아보며 아쉬움 속에서 나를 뒤돌아본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조용히 묻는다. [나는 과연, 제자 중 누군가의 인생에 좋은 기억으로 남을 만한 스승이었는가?] 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