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실성당/낙산성당
나는 유아 영세를 받았지만 사정이 있어 성인이 되고 다시 세례를 받았다. 낙산성당에서 6개월 동안 수녀님과 성경 공부를 하고 난 뒤 신부님의 평가를 통과하고서야 세례를 받을 수 있었다. 그 후 30년이 지나고 도쿄의 한인성당에서 견진 성사를 받아 신앙인으로서의 나를 내놓을 수 있게 되었다. 처음 낙산성당(가실성당)에 다니던 시절, 나는 그곳이 그렇게 오래된 성당인 줄 몰랐다. 1895년에 세워졌고, 조선 교구의 11번째 본당이며, 파리외방선교회 신부님이 초대본당신부였다는 이야기는 훗날 자료를 보고서야 알게 됐다. 나에게 있어 가실성당은 그냥 ‘우리 동네 낙산성당’이었고, 어른들이 유난히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들어가는 조금 무서운 공간이었다. 성당이 무서웠던 이유는, 거기서는 반드시 모두가 무릎을 꿇어야 했기 때문이다. 요즘 성당에서는 무릎을 꿇지 않고 서서 미사를 드리는 경우도 있지만, 가실성당에서는 그런 타협이 없다. 무릎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이다. 덕분에 나는 신앙보다 먼저 무릎 꿇음을 배웠다. 특히 노인 신자분들이 자연스럽게 무릎을 꿇는 모습을 보면서 어린 나는 속으로 생각했었다. ‘저 연세에 저게 가능하다면, 나는 아직도 멀었구나.’ 성당 안은 그리 크지 않다. 하지만 들어서는 순간 이상하게 소리가 낮아진다. 말소리도, 발소리도, 심지어 마음속 잡생각도. 1924년에 완성된 성당 건물과 2002년에 설치된 색유리화는 화려하다기보다 단정하다. 마치 “기도하러 왔으면 기도만 하라”고 말하는 듯한 얼굴이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이곳을 두고 “참 기도하기 좋은 성당”이라고 말한다. 맞다. 괜히 쓸데없는 소원은 꺼내기 미안해지는 곳이다.

어른이 되어 알고 보니, 이 조용한 성당이 품고 있는 역사는 결코 조용하지 않았다. 6·25 전쟁 때 낙산 마을은 파괴되었지만, 성당은 인민군 병원으로 사용되며 남겨졌고, 전쟁 통에 내려온 성 베네딕도회 신부님들이 사목을 맡았다. 이 성당에서 갈라져 나간 성당만 해도 황금동, 용평, 퇴강, 왜관까지 네 곳이나 있으며 일반 교구 소속이 아닌 수도회 소속의 성당이었다. 어머니가 자식 넷을 키워 시집보낸 셈이다. 입구에 서 있는 순교자 기념비도 늘 묵직하다. 200년 전부터 이곳에 살던 성섭 가문, 그리고 상주에서 순교한 성 순교자의 이름을 볼 때마다, 신앙이란 게 말로만 전해지는 게 아니라 삶으로 남는 것임을 실감하게 된다. 그래서일까. 이 성당에서는 괜히 행동도 조심하게 된다. 농담도 속으로만 한다.
가실성당은 365일 24시간 문을 닫지 않는다. ‘순례자의 집’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본당 사람들이 와서 묵고 기도할 수 있도록 내어준다. 요즘 세상에 문 닫지 않는 곳이 얼마나 될까. 아마 그래서 영화 〈신부수업〉의 촬영지로도 선택됐을 것이다. 이 성당은 카메라 앞에서도, 사람 앞에서도, 하느님 앞에서도 태도가 같다. 신자 수는 예전보다 줄어 500명 정도이다. 도시화 때문이라고 하지만, 나는 안다. 숫자가 줄어도 이곳의 무게는 줄지 않는다는 것을. 이름도 낙산성당에서 다시 가실성당으로 돌아왔듯, 이 성당은 늘 제 자리로 돌아오는 힘을 가지고 있다.
가실성당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화려한 역사도, 영화 촬영도 아니다. 차가운 바닥에 닿던 무릎의 감촉, 조용히 기도하던 노인들의 등, 그리고 그 사이에서 괜히 숨을 고르던 어린 나다. 나는 이 성당에서 신앙을 배웠다기보다, 자세를 배웠다. 몸의 자세, 마음의 자세, 그리고 시간을 대하는 자세를. 그래서 지금도 누군가 “가실성당이 왜 그렇게 좋으냐”고 물으면,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거긴요, 무릎으로 기억하는 성당이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