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여름, 시골에서 배운 삶의 체험

- 어릴 적 시골의 체험이 인생을 키운다 -

숨이 턱 막히는 무더위다. 10년 만에 한국에 들어온 뒤 맞는 가장 더운 여름날인 것 같다. 아침부터 햇살이 얼굴을 찌르듯 따갑다. 해가 뜨기 전 뒷산에 올랐지만 여름 햇볕 앞에서는 숨을 고르는 일조차 사치처럼 느껴진다. 이런 날씨를 마주할 때마다 나는 자연스럽게 어린 시절의 시골 여름으로 돌아간다.

전통 한국 시골 풍경, 고깃단지를 쌓아 놓은 돌담과 자연 식물들이 어우러진 모습

한낮의 시골은 고요하다 못해 온세상이 죽은 듯하다. 어른도 아이도 가축도, 이름 모를 야생동물들까지 모두 오침(낮잠)에 빠진다. 더위 앞에서는 누구도 예외가 없다. 그늘을 찾아 몸을 눕히고, 자연의 리듬에 자신을 맡기는 시간.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게으름이 아니라 자연과 공존하는 지혜로운 선택이다. 하지만 나는 그 시간에도 잠들지 않는다. 할 일도 많고 즐겨야 할 일도 많기 때문이다. 가장 즐거운 일은 마을앞 강을 건너는 일이다. 낙동강과 위수강이 만나는 지점, 두 강이 만들어낸 거대한 삼각주 모래밭은 어린 나에게 있어 세상에서 가장 넓은 놀이터였다. 80미터 남짓한 물길을 헤엄쳐 건너면 끝이 보이지 않는 모래사장이 펼쳐진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시커먼 물속이 나를 잡아당기는 느낌이 들지담 조금 뒤에 펼쳐질 신천지는 나를 유혹한다. 햇빛에 달궈진 보석같은 모래는 발바닥을 화끈거리게 하지만 그 뜨거움을 참고 달려가면 신기루처럼 나타나는 포플러 숲과 맑은 물 그리고 신천지가 있다. 그곳은 나만의 비밀 장소 오아시스이다. 물은 그냥 마셔도 탈이 나지 않을 정도로 깨끗하고, 주변에는 참외, 수박, 땅콩 같은 야생 먹거리들이 지천으로 자라고 있다. 물속 모래에는 모래무지가 숨어 살고 있고 하얀 황새 떼가 모래밭을 뒤덮었다가 한꺼번에 날아오를 때면 세상이 뒤집히는 장관이 펼쳐진다. 그곳에서 나는 자연과 함게 놀았고 삶의 지혜를 배웠다. 그 곳은 나에게 있어 교과서였고 실험실이었으며 운동장이었다. 혼자였지만 외롭지 않았다. 주변 만물이 모두 친구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몇 시간을 보내고 나면 내 손에는 저녁 반찬이 들려 있다. 그것은 생존이자 놀이였고, 놀이이자 교육이었다.

오후가 되어 마을에 다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고 처마밑 그늘이 길어지면 나는 또 다른 배움의 현장으로 향한다. 세종대왕의 해시계가 아니더라고 시골의 아이들은 처마밑 그늘로 시간을 예측한다. 정해진 시간이 되면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막걸리를 들고 들로 간다. 늘 소와 함께 나가서 풀밭에 풀어놓고 낫으로 소꼴을 베고 나면, 여유 시간에 그림을 그렸다. 그 그림들은 지금도 눈을 감으면 머리속에 선명하다. 무엇보다 잊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집 누렁이다. 말없이 나를 이해하고, 위험을 먼저 알아채서 알려주고 보호 해 주며, 집으로 돌아갈 때면 등을 나에게 내어주던 누렁이. 하루 일과의 피곤에 지쳐 졸다가 발 밑으로 떨어져도 절대 힘주어 밟는 일이 없다. 그 등 위에서 바라보던 저녁 하늘은 세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자연과 생명에 대한 신뢰, 공존의 감각은 그렇게 몸으로 익혔다. 이 모든 경험은 그냥 어릴 적 추억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세상을 대하는 태도가 되었고, 어려움을 견디는 힘이 되었으며, 삶을 바라보는 기준이 되었다.

요즘의 아이들은 너무 이른 나이에 인공적인 환경 속에 갇혀 산다. 편리함은 늘었지만, 자연을 온몸으로 겪을 기회는 줄어들었다. 자연 속에서의 체험은 지식이 아니라 삶의 뿌리를 길러준다. 기다림을 배우고, 위험을 감지하고, 생명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 주는 것이다. 시골 체험교육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고 생각한다. 아이들이 한 번쯤은 일주일 이상 흙을 밟고, 강을 건너고, 땀 흘려 얻은 저녁 한 끼의 무게를 느껴봐야 한다. 그것이 평생을 버티게 해주는 뿌리가 되기 때문이다. 오늘도 나는 할 일이 많아 오침을 즐기지 못한다. 하지만 이렇게 더운 날, 문득 깨닫는다. 내가 지금까지 버텨온 힘은 바로 그 뜨거운 시골 여름 한복판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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