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혜화동 로터리는 오늘날 대학로와 성북동, 창경궁 일대를 잇는 교통의 요지로 알려져 있지만 한국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이 지나간 역사적 공간이기도 하다. 해방 직후 좌우 대립이 극심했던 시기의 정치인 암살부터 4·19혁명의 학생·시민 시위에 이르기까지 격동의 현대사가 이 일대에 남아 있다.
혜화동 로터리를 대표하는 역사적 사건은 몽양 여운형 암살이다.
여운형은 1947년 7월 19일 혜화동 로터리 부근에서 차량으로 이동하던 중 총격을 받고 숨졌다. 독립운동가이자 해방 이후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했던 여운형의 죽음은 해방정국의 정치적 갈등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기록됐다. 현재 혜화동 로터리 인근에는 여운형이 피격된 장소를 알리는 ‘몽양 여운형 선생 서거지’ 표석이 설치돼 있다.
여운형은 해방 후 좌우 세력의 극단적인 대립을 넘어 통합된 국가를 건설하려 했던 대표적인 정치인이었다. 그러나 좌우합작 노선을 둘러싼 갈등 속에서 여러 차례 테러 위협을 받았고 결국 혜화동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암살은 이후 남한 정치권의 좌우 대립이 더욱 격화되는 계기 가운데 하나가 됐다.
혜화동 로터리는 13년 뒤인 1960년 4·19혁명에서도 다시 역사에 등장했다.
3·15 부정선거에 대한 반발과 김주열 열사의 시신 발견, 4월 18일 고려대 학생 시위대에 대한 정치폭력배의 습격을 계기로 4월 19일 서울의 대학생과 시민들이 대규모 시위에 나섰다.
당시 서울 시내 여러 대학에서 거리로 나온 학생들은 종로와 광화문 등으로 이동했다. 일부 시위대는 혜화동 로터리까지 진출해 경찰과 대치했다. 이후 시위는 경무대 일대로 확대됐고 경찰의 발포로 대규모 사상자가 발생했다. 4·19혁명은 결국 이승만 정권 붕괴로 이어졌다. (
혜화동 일대가 학생운동의 주요 공간이 된 데는 대학 밀집지역이라는 지리적 특성도 영향을 미쳤다.
현재 대학로 일대에는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부터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와 의학부 등이 들어섰다. 해방 이후 이 시설들은 서울대학교와 연결됐고 서울대 문리대와 의대, 성균관대학교 인문사회캠퍼스등을 중심으로 대학문화가 형성됐다.
‘대학로’라는 도로명은 1966년 서울시가 쌍림동에서 혜화동 로터리까지 이어지는 약 2.53㎞ 구간에 가로명을 부여하면서 공식적으로 등장했다. 이후 서울대학교 주요 단과대학이 관악캠퍼스로 이전한 뒤에도 이 일대는 공연장과 소극장, 문화시설이 들어서며 한국을 대표하는 대학·공연문화 거리로 변화했다.
혜화동 로터리에서 종로 방향으로 이어지는 창경궁로 역시 서울 근현대 도시개발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서울역사편찬원 자료에 따르면 이 일대 도로는 일제강점기인 1910년대부터 확장됐고 전차 노선과 도시계획에 따라 주요 간선도로로 발전했다. 1930년대에는 원남동과 돈암동·종암동을 연결하는 도로계획도 추진됐다.
결국 혜화동 로터리는 한 장소에서 여러 시대의 서울을 동시에 보여준다.
1947년에는 분단을 막고 좌우합작을 추진했던 여운형이 총탄에 쓰러졌고, 1960년에는 독재와 부정선거에 항거한 학생과 시민들이 거리를 채웠다. 이후 주변에 대학과 문화시설이 자리 잡으면서 민주화운동과 청년문화, 공연예술의 공간으로 성격이 변화했다.
지금은 자동차와 버스가 끊임없이 오가는 평범한 교차로처럼 보이지만 혜화동 로터리 주변에는 해방정국과 민주화운동, 서울의 도시 성장사가 겹겹이 쌓여 있다. 서울 한복판의 작은 로터리가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갈림길 가운데 하나였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