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의 살아있는 현대사”…102세 윤공희 대주교, 76년째 이어가는 사제의 길일제강점기와 해방, 남북 분단, 6·25전쟁, 군사독재와 5·18민주화운동을 모두 겪은 윤공희 빅토리노 대주교가 한국 천주교회의 ‘살아있는 현대사’로 주목받고 있다.1924년 11월 8일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태어난 윤 대주교는 2026년 8월 현재 만 101세다. 오는 11월 8일 만 102세가 된다. 과거 한국식 세는나이로 계산하면 올해 103세에 해당한다. 따라서 ‘103살’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경우 세는나이임을 명시하는 것이 정확하다.윤 대주교는 현재 한국 천주교 생존 주교 가운데 최고령으로 알려져 있다. 1950년 3월 20일 사제품을 받아 올해 사제수품 76주년을 맞았다. 2026년 5월에도 외부 인사를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확인돼 백수를 넘긴 나이에도 원로 성직자로서 삶을 이어가고 있다.윤 대주교의 생애는 한국 천주교 현대사의 굵직한 장면과 겹친다.평안남도 진남포에서 본당 회장으로 활동한 아버지와 잡화상을 운영한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1937년 함경남도 덕원신학교에 들어갔다. 해방 이후 북한 정권의 종교 탄압이 거세지고 신학교가 폐쇄되자 1950년 1월 월남했다.같은 해 3월 서울 성신대학을 졸업하고 사제품을 받았다. 불과 석 달 뒤 6·25전쟁이 발발했다.전쟁 중 국군의 북진으로 고향 진남포를 다시 찾았고 어린 시절 다녔던 성당에서 사제로서 미사를 봉헌했다. 당시 부모와 재회했지만 중공군 참전으로 다시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부모와 사실상 마지막 이별을 했다.전쟁 이후 교황청 유학길에 올라 우르바노대학교와 그레고리오대학교에서 공부했다. 귀국 후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총무 등을 거쳐 한국 천주교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맞았다.1963년 교황 바오로 6세가 수원교구를 신설하면서 윤공희 신부를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했다. 같은 해 10월 20일 로마에서 바오로 6세 교황 주례로 주교품을 받았다.1967년 노기남 대주교 은퇴 이후에는 약 1년간 서울대교구장 서리까지 맡았다. 이후 1973년 광주대교구장으로 임명돼 대주교가 됐으며 2000년 은퇴할 때까지 광주대교구를 이끌었다.특히 윤 대주교의 이름은 1980년 5월 광주와 떼어놓기 어렵다.당시 광주대교구장이었던 그는 계엄군의 폭력과 시민들의 희생을 현장에서 목격했다. 처음에는 극도의 공포를 느꼈다고 훗날 고백했지만 이후 교구 사제들과 함께 광주의 상황을 외부에 알리는 데 나섰다.남동성당 김성용 신부가 광주를 빠져나가 김수환 추기경에게 현지 상황을 전달하도록 했고, 이후 5·18 희생자를 추모하고 부상자와 구속자들의 명예 회복을 요구하는 활동을 계속했다.윤 대주교는 이후에도 5·18 진상규명과 민주주의, 인권 문제에 목소리를 냈다. 1997년에는 5·18 관련 담화를 통해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른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사면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그에게 1980년 5월은 평생 마음속에 남은 사건이었다. 자신이 희생자들과 함께하지 못했다는 자책과 부끄러움을 여러 차례 털어놨다. 5·18의 현장을 지켜본 최고위 성직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윤 대주교의 증언은 한국 현대사에서도 중요한 기록으로 남았다.2025년 3월 20일에는 광주 라마다플라자 충장호텔에서 그의 생애를 담은 평전 ‘대주교 윤공희’ 헌정식이 열렸다. 이날은 윤 대주교가 사제품을 받은 지 정확히 75년이 되는 날이었다.김형수 작가가 집필한 590여 쪽의 평전에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분단, 전쟁, 군사독재와 민주화 과정을 통과한 윤 대주교의 생애가 담겼다.윤 대주교는 헌정식에서도 자신의 공적보다 부족했던 삶을 먼저 돌아봤다. 사제로서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을 우선해 돌보는 삶을 충분히 살았는지 반성하게 된다는 취지의 말을 남겼다.100세를 넘긴 뒤에는 또 다른 시련도 찾아왔다.윤 대주교는 2024년 봄 폐암 판정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19세부터 40년 넘게 담배를 피웠던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흡연이 윤 대주교의 폐암을 직접 일으켰다고 의학적으로 확인된 자료는 없는 만큼 ‘담배 때문에 폐암에 걸렸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암 진단 이후 윤 대주교는 수술과 약물·항암 치료를 받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나 2025년 5월 취재 당시 주변에서는 오히려 건강이 좋아진 것 같다는 평가가 나왔고, 윤 대주교는 직접 대화를 나누고 농담을 하며 노래까지 불렀다.애창곡도 세대를 넘는다. 은희의 ‘꽃반지 끼고’를 좋아하고 장윤정의 ‘어머나’까지 부르는 것으로 전해졌다. 사람들과 대화하고 웃으며 지내는 생활도 계속하고 있다.특히 2026년 5월 18일에는 5·18 46주년을 맞아 윤 대주교를 예방한 임문영 당시 광주 광산을 국회의원 보궐선거 후보와 만나 대화를 나눴다. 당시 보도에서도 윤 대주교는 5·18의 참상을 직접 목격하고 진실을 알리는 데 기여한 원로 성직자로 소개됐다.백수를 넘어서도 새로운 책과 세상 변화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점도 눈길을 끈다. 최근 예방 자리에서는 평소 읽던 인공지능(AI) 관련 서적이 공개되기도 했다. 단순히 오래 사는 것을 넘어 새로운 시대를 계속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윤 대주교가 생전에 다시 한번 가보고 싶다고 말해온 곳은 화려한 성당이나 로마가 아니다.고향 진남포와 사제의 꿈을 키웠던 함경남도 덕원이다.그는 자신의 구술을 담은 ‘윤공희 대주교의 북한교회 이야기’를 통해 북녘의 신자들도 같은 형제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뜻을 남겼다.1950년 고향을 떠난 젊은 신학생은 사제가 됐고, 주교와 대주교가 됐으며 한국 현대사의 가장 격렬했던 현장을 지나왔다.수원교구 초대 교구장, 서울대교구장 서리, 제7대 광주대교구장을 거쳐 37년간 교구장으로 활동했다. 1950년 사제품을 받은 이후에는 76년째 사제의 길을 걷고 있다.그리고 2026년, 만 101세의 윤공희 대주교는 여전히 한국 천주교의 ‘살아있는 역사’로 남아 있다.그의 긴 삶을 관통하는 마지막 소망 역시 분단 이전에 머물러 있다.고향 진남포와 덕원신학교를 다시 한번 자신의 눈으로 보는 것이다.
윤공희 대주교 올해 102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