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일대학교 스털링기념도서관 전시 복도에는 중국 근대사의 선구자인 용굉(容閎·Yung Wing, 1828∼1912)의 동상이 서 있다. 이 동상은 그의 고향인 중국 광둥성 주하이시가 예일대 졸업 150주년을 기념해 2004년 기증한 것이다.
용굉의 동상이 있는 곳은 예일대 로스쿨의 스털링 법학관이 아니라 스털링기념도서관이다. 예일대에는 이름이 비슷한 두 건물이 있어 혼동하기 쉽다.
용굉은 1850년 예일대에 입학해 1854년 졸업했다. 미국 대학을 졸업한 최초의 중국인으로 기록된다. 당시 조선은 철종 5년으로, 안동 김씨를 중심으로 한 세도정치가 이어지던 시기였다.
중국으로 돌아간 용굉은 서양의 교육과 기술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860년대에는 청나라의 근대식 공업시설 건설을 위해 미국에서 기계와 설비를 구매하는 일을 맡았다. 이 설비는 상하이에 세워진 강남기기제조총국의 기반 가운데 하나가 됐다. 강남기기제조총국은 무기와 기계를 생산하고 선박을 건조한 청나라 최대 규모의 근대 군수공장으로 성장했다.
용굉의 대표적인 업적은 중국유학생교육사업, 이른바 ‘유미유동’ 계획이다. 청나라는 그의 제안에 따라 1872년부터 1875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어린 학생 120명을 미국에 보냈다.
학생들은 미국 가정에서 생활하며 학교에 다녔다. 그러나 청 조정은 이들이 지나치게 서구화되고 있다는 보수파의 비판이 커지자 1881년 사업을 중단하고 학생들을 귀국시켰다. 계획은 완성되지 못했지만 귀국생 가운데서는 철도 기술자와 외교관, 군인, 교육자 등이 배출됐다. 대표적인 인물이 중국인 주도로 철도를 건설한 기술자 잔톈유다.
용굉의 또 다른 중요한 활동은 1874년 페루에서 진행한 중국인 계약노동자 실태조사다. 그는 청나라가 파견한 조사단의 일원으로 페루 농장과 작업장에서 일하던 중국인 노동자의 처우를 조사했다.
19세기 중반 중국인 노동자들은 ‘계약’을 맺고 쿠바와 페루 등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모집 과정에서 납치와 사기가 빈번했고, 현지에 도착한 뒤에는 계약기간과 임금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노동자가 다른 고용주에게 넘겨지거나 폭행과 감금, 과도한 노동에 시달리는 일도 이어졌다.
용굉은 중국인 노동자뿐 아니라 미국인과 페루인, 칠레인 등의 증언을 수집했다. 조사 내용에는 임금 체불과 매매, 도주자에 대한 폭력, 족쇄 사용, 질병과 과로로 인한 사망 등이 담겼다. 그는 이러한 노동이 명목상 계약일 뿐 실질적으로는 노예제와 다르지 않다고 판단했다.
당시 미국에서는 남북전쟁이 끝난 1865년 수정헌법 제13조에 따라 노예제가 폐지됐다. 그러나 1874년 당시 노예제가 세계적으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쿠바는 1886년, 브라질은 1888년에야 노예제를 폐지했다. 따라서 당시 상황을 ‘세계적으로 노예제가 금지된 때’라고 표현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조선인이 이 시기 중국인과 함께 노예노동의 대체 인력으로 대규모 동원됐다는 주장도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다. 한인의 집단적인 해외 계약이주는 1903년 하와이 이민과 1905년 멕시코 이민을 중심으로 전개됐다.
미국의 중국인 배척 정책에 관한 연도 역시 구분할 필요가 있다. 1870년에 제정된 것은 ‘중국인 배척법’이 아니라 귀화법 개정안이었다. 이 법은 귀화 자격을 백인과 아프리카계로 한정하면서 중국인을 비롯한 아시아계의 귀화를 사실상 배제했다.
중국인 노동자의 미국 입국을 직접 금지한 중국인배척법은 1882년 제정됐다. 이 법은 중국인 노동자의 입국을 10년간 중단시키고 중국인의 귀화를 금지했다. 1892년 기어리법으로 연장됐으며 1902년 다시 확대됐다. 중국인배척법과 그 후속 법률은 신분증명서 소지 의무와 구금·추방 절차를 강화하면서 이후 미국 이민통제 제도의 한 원형이 됐다.
용굉 자신도 이 제도의 피해자가 됐다. 그는 1852년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지만 1898년 청나라의 개혁운동에 가담했다가 서태후 세력의 탄압을 피해 홍콩으로 달아났다. 당시 그의 체포에 7만 달러의 현상금이 걸렸다는 기록이 전해지지만, 이를 현재 가치로 정확히 환산해 40억원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용굉은 1902년 미국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미국 당국은 1870년 귀화법과 중국인 배척 법제를 근거로 그의 시민권 효력을 인정하지 않고 입국을 허가하지 않았다. 별도의 정식 재판을 통해 시민권이 취소됐다기보다 행정부가 기존 귀화를 무효로 취급한 것으로 보는 편이 정확하다.
그는 결국 정식 허가 없이 미국에 들어가 막내아들의 예일대 졸업을 지켜봤다. 이후 코네티컷주 하트퍼드에서 생활하다 1912년 83세로 세상을 떠났다.
용굉의 생애에는 근대화와 교육 교류, 계약노동과 인종차별, 시민권과 이민통제라는 19세기 후반의 문제가 겹쳐 있다. 미국에서 배운 지식으로 중국의 근대화를 추진하고 해외 노동자의 참상을 알렸지만, 정작 자신은 인종을 기준으로 한 미국의 배척 법제에 의해 시민권을 부정당했다. 예일대 도서관의 동상은 한 명의 선구자를 기리는 기념물인 동시에 이민과 인권의 모순된 역사를 보여주는 증거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