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 서가에서 책등에 붙은 숫자는 단순한 관리번호가 아니다. 철학과 종교, 사회과학, 자연과학, 기술, 예술, 문학, 역사 등 인간이 축적한 지식을 일정한 기준에 따라 나눈 결과다. 오늘날 익숙한 도서관 분류체계가 만들어지기까지는 수천 년에 걸친 지식 정리의 역사가 있었다.
도서관 분류의 출발점은 고대 문명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의 도서관과 문서 보관소에서도 점토판이나 두루마리를 내용과 용도에 따라 구분했다.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은 표준 분류번호가 존재하지 않았지만 종교·행정·문학·의학 등 자료의 성격에 따라 보관 장소와 목록을 달리하는 방식이 사용됐다.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를 거쳐 중세 유럽으로 접어들면서 지식 분류는 당시의 교육체계와 종교관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신학을 중심으로 철학, 문법, 수사학, 논리학, 산술, 기하학, 음악, 천문학 등이 주요 학문 영역으로 구분됐다. 도서관의 서가 역시 이러한 학문 체계와 밀접하게 연결됐다.
인쇄술이 확산된 15세기 이후 상황은 크게 달라졌다. 책의 생산량이 급증하면서 단순히 서가 위치만 기록하는 방식으로는 자료를 관리하기 어려워졌다. 특히 18~19세기 대학과 공공도서관이 성장하면서 여러 도서관에서 공통으로 사용할 수 있는 체계적인 분류법의 필요성이 커졌다.
현대 도서관 분류사에서 가장 큰 전환점은 미국의 사서 멜빌 듀이가 만든 듀이십진분류법, DDC였다.
듀이는 1873년 분류체계를 구상했고 1876년 첫 판을 발표했다. 핵심은 인간의 지식을 0부터 9까지 숫자를 이용해 10개의 큰 영역으로 나누고 다시 소수점 아래 숫자를 이용해 세부 분야로 계속 확장할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현재 DDC의 기본 구조에서는 000을 컴퓨터과학·정보·총류, 100을 철학·심리학, 200을 종교, 300을 사회과학, 400을 언어, 500을 자연과학·수학, 600을 기술, 700을 예술·오락, 800을 문학, 900을 역사·지리 분야로 분류한다.
예를 들어 500이 자연과학이라면 그 아래에 수학과 물리학, 화학, 지구과학, 생명과학 등이 다시 배치된다. 숫자가 길어질수록 주제가 세분화되는 구조다.
이 방식의 가장 큰 장점은 새로운 분야가 등장해도 기존 구조를 크게 바꾸지 않고 세부 숫자를 추가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듀이십진분류법은 이후 여러 차례 개정됐으며 현재는 국제 도서관 협력기관 OCLC가 관리하고 있다. 온라인 환경에서는 WebDewey를 통해 지속적으로 내용이 갱신되고 있다.
미국의 대형 연구도서관에서는 또 다른 체계가 발전했다. 미국 의회도서관이 구축한 미국의회도서관분류법, LCC다.
LCC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미국 의회도서관의 방대한 장서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기 위해 개발됐다. 숫자를 중심으로 하는 DDC와 달리 알파벳과 숫자를 결합해 주제를 구분하는 것이 특징이다.
예를 들어 철학·심리학·종교는 B, 역사는 D·E·F 등 여러 영역, 사회과학은 H, 정치학은 J, 법학은 K, 교육은 L, 음악은 M, 미술은 N, 언어와 문학은 P, 과학은 Q, 의학은 R, 농업은 S, 기술은 T 등으로 구분된다.
DDC가 전 세계 공공도서관과 학교도서관 등에서 폭넓게 활용되는 데 비해 LCC는 방대한 전문자료를 보유한 대학도서관과 연구도서관에서 많이 사용된다.
한국에서도 독자적인 도서관 분류체계가 발전했다.
대표적인 것이 한국도서관협회가 개발한 한국십진분류법 KDC다. KDC는 듀이십진분류법과 마찬가지로 십진식 구조를 사용하면서 한국의 학문과 문화적 특성을 반영해 구성됐다. 초판은 1964년 발행됐으며 여러 차례 개정을 거쳤다. 2013년에는 제6판이 발행됐다.
한국 도서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000 총류, 100 철학, 200 종교, 300 사회과학, 400 자연과학, 500 기술과학, 600 예술, 700 언어, 800 문학, 900 역사의 배열은 KDC 체계에 따른 것이다.
DDC와 비슷해 보이지만 세부적으로는 차이가 있다. 한국의 역사와 언어, 문학, 종교 등 국내 자료의 특성을 보다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조정된 부분이 많다.
같은 책이라도 어느 도서관에 있느냐에 따라 책등에 붙는 분류번호가 달라질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공공도서관이 KDC를 사용하고 대학도서관이 LCC를 채택한다면 동일한 주제의 책도 전혀 다른 기호를 받을 수 있다.
분류번호는 단순히 책의 물리적 위치를 알려주는 기능에 그치지 않는다. 비슷한 분야의 자료를 한곳에 모이도록 해 이용자가 관심 분야의 책을 연속적으로 발견하도록 만드는 역할도 한다.
특히 도서관 서가에서는 검색하지 않았던 책을 우연히 발견하는 ‘브라우징’이 중요하다. 특정 책을 찾으러 갔다가 바로 옆에 꽂힌 같은 분야의 다른 책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분류체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서관 분류체계가 완벽한 것은 아니다.
분류법은 만들어진 시대의 학문 구조와 사회적 인식을 반영한다. 새로운 학문이나 기술이 등장하면 기존 체계 안에서 적절한 자리를 찾기 어려운 경우도 발생한다. 인공지능, 데이터과학, 젠더 연구, 환경 문제처럼 여러 학문 분야가 결합된 영역이 확대되면서 한 권의 책을 하나의 주제에만 배치하는 전통적인 분류 방식의 한계도 나타나고 있다.
이에 따라 현대 도서관에서는 분류번호뿐 아니라 주제명, 키워드, 저자명, 서명, 메타데이터 등을 결합해 자료를 검색한다. 종이책 중심의 서가 분류에서 디지털 정보 검색 중심으로 도서관의 기능이 확대된 것이다.
전자책과 학술 데이터베이스에서는 한 자료에 여러 주제어를 동시에 부여하는 방식도 일반화됐다. 물리적인 책은 한 장소에만 놓을 수 있지만 디지털 정보는 여러 분야에서 동시에 검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공지능 시대에는 분류의 개념이 다시 변화하고 있다. 자연어 검색과 의미 기반 검색이 발전하면서 이용자가 정확한 분류번호나 키워드를 몰라도 원하는 자료를 찾을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고 있다.
그렇다고 전통적인 분류체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수백만 권의 책과 자료가 어떤 분야에 속하는지를 일관된 기준으로 표현하는 분류번호는 여전히 도서관 운영과 자료 검색의 기본 인프라 역할을 하고 있다.
1876년 듀이가 숫자로 지식을 나누기 시작한 이후 약 150년이 지났지만 도서관 분류의 핵심 질문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 지식은 어디에 속하는가.’
서가에 붙어 있는 000부터 900까지의 숫자는 그 질문에 대한 인류의 오랜 답변이다. 도서관 분류의 역사는 결국 책을 정리한 역사가 아니라 인간이 세계의 지식을 어떤 질서로 이해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이기도 하다.
DDC의 1873년 구상·1876년 초판 발행과 현재 OCLC 관리 체계, KDC 제6판의 2013년 발행 사실을 공식 자료로 확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