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희춘은 중종 33년인 1538년 문과에 급제한 전도유망한 관료였다. 그러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을사사화에 연루돼 1545년 함경도 종성 등지로 유배됐고, 그곳에서 20년을 보냈다. 하루아침에 중앙 정치 무대에서 밀려나 변경으로 쫓겨난 충격은 컸을 것이다. 청춘과 출세의 꿈은 그 시점에서 사실상 중단됐다.
긴 유배는 개인의 삶에만 상처를 남기지 않았다.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토지와 노비는 흩어졌고, 노모를 비롯한 가족들은 친척의 도움에 의존해 연명해야 했다. 유희춘 개인과 일가 모두가 몰락을 겪은 셈이다.
전환점은 1567년이었다. 선조가 즉위하면서 사화의 피해자였던 사림파가 복권됐고, 곧 정권을 장악했다. 유희춘의 처지도 급변했다. 유배에서 풀려난 그는 홍문관 응교를 시작으로 사헌부, 사간원 등 삼사를 두루 거쳤고, 성균관 대사성, 홍문관 부제학, 예조참판, 사헌부 대사헌에 이르렀다. 억울하게 탄압받았던 인물이 정치적 보상을 받는 전형적인 복귀 서사처럼 보인다. 표면만 놓고 보면 그렇다.
유희춘은 사림 인사였다. 명분과 절의를 중시하고, 훈구 대신들의 특권과 반칙을 비판했을 존재로 흔히 상정된다. 세속적 욕망에서 거리를 두고 수신과 도학에 몰두했을 것이라는 이미지도 자연스럽게 따라붙는다. 그러나 그가 남긴 미암일기는 이런 통념과 거리가 멀다. 기록 속의 유희춘은 이재에 집착하고, 반칙과 특권을 당연하게 활용한 인간의 모습에 가깝다.
오랜 궁핍의 반작용이었을까. 관직에 복귀하자마자 그가 가장 공을 들인 일은 주택 마련이었다. 20여 년간 가족이 남의 집에 얹혀 살았던 사정을 감안하면 이해할 여지도 있다. 문제는 그 방식이었다. 그는 가족이 거주할 집뿐 아니라 창평과 강진 등지에 세 채의 집을 더 지었고, 이 가운데에는 첩을 위한 거처도 포함돼 있었다.
조선시대 관료의 녹봉은 넉넉하지 않았다. 봉급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하기도 빠듯한 수준이었다. 20년 유배로 경제적 기반이 붕괴된 인물이 단기간에 네 채의 집을 마련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유희춘의 선택은 공공 자원의 동원이었다.
선조 2년 11월 부제학으로 승진한 뒤 전라감사로 재직하던 선조 4년 4월까지 약 1년 6개월 동안 그는 지역 수령과 군인, 승려까지 동원해 대규모 주택 공사를 진행했다. 대둔산에서 기와를 굽게 하고, 완도 등지에서 목재를 실어와 13칸짜리 집을 지었다. 집터 역시 누군가로부터 제공받은 밭이었다. 직권 남용이자 국고 손실에 해당하는 행위였지만, 당시 정계 중심에 있던 사림 인사에게 이를 문제 삼기는 어려웠다.
전라감사 재직 중 지은 집 가운데는 창평 수국리에 자리한 55칸짜리 저택도 있다. 담양부사와 창평현령 같은 지방 수령뿐 아니라 용천사, 옥천사 등의 승려까지 공사에 동원됐다. 당시 주택 규모는 2품 이상 관료라도 40칸, 3품 이하는 30칸으로 제한돼 있었다. 명백한 불법이었다.
권세가 커지자 주변도 달라졌다. 그의 첩과 누이 역시 유희춘의 권력을 배경으로 새 집을 지었다. 천민 출신 첩의 집은 22칸 규모였고, 공사는 영암군수와 전라수사가 맡았다. 개인의 사사로운 거처에 관청과 군이 동원된 사례였다.
조선의 관료에게는 부모 묘역을 돌본다는 명목의 휴가가 주어졌다. 유희춘의 기록에 따르면 그가 서울에서 수원, 공주, 전주, 남원, 광주, 강진 등을 거칠 때마다 지방 수령들이 나와 음식과 연회를 제공했고, 숙소는 관아였다. 이동에는 관아의 말과 군인 호위가 뒤따랐다. 길목마다 친인척들이 나와 각종 민원을 청탁했고, 조상의 묘역을 정비할 때도 전라감사와 순천부사 등에게 인력과 식량, 석물 공사를 요청했다.
지방관들이 그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한 이유는 중앙 정계에서의 영향력이었다. 확인된 관직 청탁만 120건, 군 면제 청탁도 20건에 달했다. 이를 통해 그는 녹봉을 제외하고도 충분한 경제적 이익을 챙길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지인의 녹패를 이용해 쌀을 타내는 불법까지 저질렀다. 병조와 광흥창의 반납 요구에도 이듬해 가을까지 버티며 쌀을 추가로 수령했다.
유희춘만의 일탈이었을까. 그렇게 보기는 어렵다. 훈구라는 적폐를 청산했다고 자부하던 사림은 권력을 장악한 뒤 또 다른 카르텔을 형성했고, 공공 재화를 사유화하며 기득권을 유지했다. 초려삼간과 안빈낙도를 노래하던 사림의 이면에는 이런 현실이 공존했다. 미암일기는 그 민낯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