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1년 3월 13일 평안도 용천에서 태어난 함석헌은 올해로 탄생 123주년을 맞는다. 1916년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 그는 1919년 3·1운동에 평고 연락책으로 참여하며 역사와 첫 인연을 맺었다. 전날 숭실학교 지하실에서 받은 독립선언서를 경찰서 앞에서 배포하고 시위에 나선 그는, 훗날 이를 “목이 타도록 만세를 외치고 총검 든 일본군에 맞섰던 생애 가장 상쾌한 날”이라 회고했다. 이 사건으로 퇴학당했으나 복교를 거부하고 오산학교로 옮겨 유영모 교장의 지도를 받았다.
1928년 모교 역사교사로 돌아온 그는 일본 유학 시절 우치무라 간조의 영향을 받아 무교회 운동에 참여, 김교신과 함께 잡지 『성서조선』을 창간했다. 1935년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탈고하고, 3년에 걸쳐 집필한 세계사 원고는 2023년 『뜻으로 본 인류역사』로 빛을 보았다. 일제의 일본어 강의 강요와 창씨개명을 거부하며 교직을 떠난 그는 농사와 집필로 생계를 이어갔다.
해방 이후에도 시련은 이어졌다. 평북자치위원회 교육부장 재직 중 소련군에 구금됐고, 오산학교 반정부 전단 사건 배후로 또다시 수감됐다. 1947년 서울로 내려와 YMCA 강연을 시작했고, 1958년 『사상계』에 발표한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로 투옥됐다. 1965년에는 한일회담 반대 단식투쟁에 나섰다.
1970년 창간한 『씨ᄋᆞᆯ의 소리』는 인가취소와 복간을 거듭하며 구국 저널리즘의 상징이 됐다. 그는 박정희 종신집권 반대투쟁, 1976년 3·1 구국선언, 한국인권운동연합회 활동 등으로 민주화 운동 전면에 섰다. 1979년과 1985년 두 차례 노벨평화상 후보에 올랐으며, 퀘이커 세계대회에 참석해 해외를 순방했다.
1980년 신군부의 가택연금과 잡지 강제폐간, 화재로 인한 서재 소실 등 역경 속에서도 그는 끝까지 펜을 놓지 않았다. 1988년 서울올림픽 평화대회 위원장을 맡고 『씨ᄋᆞᆯ의 소리』를 복간한 그는 이듬해인 1989년 2월 4일, 88세로 생을 마감했다.
함석헌의 삶은 20세기 한국이 남긴 가장 깊은 사상적 씨앗으로, 그의 신념 “생각하는 백성”은 오늘에도 살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