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장 자살 뒤 체포된 친일 괴뢰 수반, 두 달 만에 사형 집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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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일본의 패전과 함께 중국 대륙에서는 친일 괴뢰 정권 인사들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가 시작됐다. 국민정부는 9월 말부터 전국적으로 이른바 ‘한간’ 색출에 나섰고, 대표적 인물로 꼽힌 천궁보의 행적은 당시 혼란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천궁보는 일본 패전 직후 난징 괴뢰정부의 핵심 인사로서 책임 추궁을 피하기 위해 일본으로 도피했다. 일본 측은 그의 신변을 보호하는 동시에 ‘자살’했다는 허위 정보를 퍼뜨려 은신을 도왔다. 교토 일대에서 일본 이름을 사용하며 숨어 지냈고, 한때 금각사 인근으로 거처를 옮기기도 했다.

그러나 중국 국민정부는 그의 생존 사실을 파악하고 일본 측에 신병 인도를 강하게 요구했다. 일본은 처음에는 ‘연금 상태’를 이유로 거부했지만, 연합국 점령 상황 속에서 결국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송환을 수락했다.

1945년 10월, 천궁보는 수갑을 찬 채 중국으로 압송됐다. 이듬해 4월 난징에서 열린 재판에서 그는 약 8시간 동안 혐의를 부인하며 책임을 회피하는 발언을 이어갔다. 하지만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4월 12일 사형을 선고했다.

선고 두 달 뒤인 1946년 6월 3일, 천궁보는 형장에서 처형됐다. 일본과 협력한 괴뢰 정권 수반 가운데 가장 상징적인 처벌 사례로 기록됐다.

같은 시기 난징 정권의 또 다른 핵심 인물인 저우푸하이는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항소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됐고, 복역 중 사망했다. 일본 측에서 천궁보를 지원했던 고노에 후미마로는 전범 조사 압박 속에 1945년 12월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한편 중국 전구의 일본군 총사령관이었던 오카무라 야스지는 종전 직후에도 점령지 통제를 유지하려 했으나, 결국 연합국과 국민정부의 압력 속에 항복 절차를 밟았다.

천궁보 사건은 패전 직후 동아시아에서 벌어진 정치적 청산과 권력 재편의 단면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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