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남의 새벽, 그리고 낯선 세계의 시작]
1997년 7월 11일 새벽 6시 30분, 동대구역. 아직 잠에서 덜 깬 역사는 이른 시간임에도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함께 떠나는 다섯 명의 유학생과 인사를 나누고 서울행 열차에 몸을 실었을 때, 가슴 한구석에는 설렘과 두려움이 동시에 고여 있다. 1년이라는 시간, 낯선 나라에서의 삶이 과연 나에게 무엇을 남겨줄 것인가. 김포공항에서 다른 지역의 팀과 합류했을 때, 우리는 모두 가슴에 태극마크를 달고 있다. 마치 국가대표라도 된 듯, 말없이 서로의 이름표를 바라보며 웃었다. 영국 항공 노조의 파업으로 스위스를 경유해야 한다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고, 우리는 취리히를 향해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는 몽골의 고비사막 위를 한참 동안 날았다. 끝없이 펼쳐진 모래의 바다, 생명이라곤 허락되지 않을 것 같은 황량함 속에서 인간의 존재는 한없이 작아 보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갑자기 시야에 들어온 초록빛. 사막을 지나 만난 우크라이나의 들판과 호수는 세상이 얼마나 다양한 얼굴을 지니고 있는지를 말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그 극적인 대비는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낯선 일상에서 배운 것들]
영국 남부의 작은 해안 도시, 보그너 리지스(Bognor Regis). 치체스터 교육대학에서의 유학 생활은 기대와 현실 사이에서 시작되었다. “성처럼 큰 집”이라는 말과 달리, 내가 머문 홈스테이는 소박한 벽돌집이었다. 좁은 방, 싱글 침대 하나, 손때 묻은 카펫. 화려함 대신 생활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공간이었다. 아침 식사는 늘 간단했다. 우유 한 잔, 시리얼, 식빵 한 조각. ‘딜리셔스!’를 외치며 웃었지만, 김치 생각이 간절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이 나라의 진짜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잘 가꿔진 자연, 질서 정연한 거리, 서로를 간섭하지 않는 시민들. 동시에 높은 세금, 노후에 대한 불안, 거리의 홈리스들. 부유한 나라에도 나름의 고통과 책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실감했다.
[교실에서 다시 만난 ‘교사라는 이름’]
유학의 핵심은 언어 그 자체가 아니었다. 영어를 ‘가르치는 법’ 이전에, 아이를 대하는 교사의 태도와 교육의 철학을 배우는 시간이었다. 초등 교사는 연기자여야 한다며 온몸으로 수업을 보여주던 교수의 모습은, 어느새 익숙함에 기대어 나태해진 내 교직 생활을 되돌아보게 했다.
현지 학교를 방문했을 때의 충격은 더욱 컸다. 교과서도, 화려한 게시물도 없었지만, 아이들은 스스로 배우고 있었다. 한 교사가 몇 년에 걸쳐 같은 아이를 가르치며, 교육은 시험이 아니라 관계와 시간의 축적이라는 사실을 조용히 증명하고 있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간다는 것]
유학의 밤들은 또 다른 배움의 시간이었다. 사물놀이와 아리랑이 울려 퍼지던 국제 요리의 밤, 에든버러에서 만난 재즈와 축제의 열기, 치체스터 성당에서 들었던 베토벤 교향곡의 울림. 그 모든 순간 속에서 나는 ‘한국인’이었다. 늦은 밤 해변에서 부르던 고향 노래, 런던 빅토리아역에서 만난 한국 유학생의 반가운 얼굴, 거리 곳곳에서 발견한 한국 자동차와 상표들. 그때마다 가슴이 뭉클해졌다. 멀리 떠나와서야 비로소 선명해지는 것이 있었다. 내가 누구인지, 어디에서 왔는지.
[떠남의 끝에서, 다시 시작을 생각하다]
1997년 12월 8일 새벽. 이곳을 떠난다는 생각에 쉽게 잠들 수 없었다. 교수들과 호스트 가족의 얼굴이 떠올랐고, 처음 느꼈던 설렘과 두려움이 겹쳐졌다. 영국에서의 유학은 영어 실력을 키워준 시간이기보다, 삶을 바라보는 눈과 교사로서의 나를 다시 세워준 시간이었다. 언어는 조급함으로 자라지 않는다. 사람도, 배움도 마찬가지다. 그 사실을, 나는 먼 나라의 작은 교실과 소박한 일상 속에서 배웠다. 그리고 지금도 그 여름의 기억은, 교육을 이야기할 때마다 조용히 나에게 묻는다.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보다 먼저, “어떤 어른으로 아이들 앞에 설 것인가”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