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년 만의 무죄, 골령골에서 되찾은 이름 이관술

지난해 12월22일 항일 혁명가 이관술이 ‘조선정판사 사건’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1946년 사건 발생 이후 79년 만이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대전형무소에서 끌려나가 총살된 그의 삶은 오랜 침묵 끝에 사법적 판단으로 복권됐다.

2025년 12월31일, 대전 동쪽 산내면의 대전 산내 골령골에는 30여 명이 모였다. 이곳은 1950년 6월 말부터 7월 중순까지 법적 절차 없이 최소 1800명 이상이 학살돼 암매장된 장소로,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으로 불린다. 정판사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수감 중이던 이관술 역시 1950년 7월3일 이곳에서 생을 마쳤다.

이날 골령골에서는 ‘이관술 재심 무죄’를 기리는 고유제가 열렸다. 학암이관술기념사업회 주관으로 유족과 시민사회가 함께한 자리였다. 외손녀 손옥희는 “지난 30년간 할아버지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 전국을 다녔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재심 무죄를 이끈 연구자와 변호인단에 대한 감사도 전했다.

이관술은 울산 지주 가문 출신으로 동경고등사범학교 유학을 다녀온 엘리트 지식인이었다.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재직 중 학생들의 항일 시위 탄압을 목도한 뒤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경성반제동맹·경성콤그룹 사건 등으로 투옥과 탈출을 반복했고, 해방 뒤에는 합법 정당이던 조선공산당에서 재정부장을 맡았다. 1945년 선구회 설문조사에서는 여운형·이승만·김구·박헌영에 이어 차기 지도자 추천 5위에 올랐다.

그의 운명을 바꾼 사건이 1946년 5월 ‘조선정판사 사건’이다. 미군정은 조선정판사 인쇄시설을 이용해 위조지폐를 대량 인쇄해 자금으로 사용했다고 발표했다. 이관술 등 11명이 피의자로 지목됐고, 고문과 조작을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46년 11월 무기징역 등 중형이 선고됐고, 이듬해 상고는 기각됐다. 사건 이후 근택빌딩 몰수와 〈해방일보〉 폐간으로 조선공산당은 불법화의 길로 접어들었다.

정판사 사건의 실체를 집요하게 파고든 이는 역사학자 임성욱이다. 그는 당시 수사·공판 기록이 거의 남지 않은 상황에서 신문·잡지·재판 관련 책자를 모아 2015년 박사논문과 단행본으로 사건을 재구성했다. 핵심 증거물의 부재, 범행 시점의 임의 변경, 숙직제 미실시 기간의 공모 주장, 압수된 숙직일지의 실종 등 다수의 모순을 들어 ‘조작 가능성’을 제기했다. 이 연구는 훗날 재심의 토대가 됐다.

유족의 길은 험난했다. 1996년 고향 울산에 세운 항일 비석은 반공 단체 압력으로 철거됐다. 1기 진화위 조사로 골령골 불법 처형 사실은 확인됐지만, 정판사 사건의 굴레는 남았다. 2020년 독립유공자 서훈 신청은 ‘해방 후 행적’을 이유로 불인정됐다. 2기 진화위 조사도 중지됐다.

전환점은 2022년 말이었다. 재심·국가보안법 사건 전문 변호사 신윤경, 장경욱이 사건을 맡았다. 이들은 임성욱의 연구를 바탕으로 당시 ‘조선형사령’상 유치기간을 재검토했다. 언론 보도를 대조해 구금 일자를 특정한 결과, 이관술을 포함한 공동 피고인 다수가 40일을 초과한 불법 구금 상태였음이 드러났다.

2025년 10월13일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재심 개시를 결정했다. 12월15일 검찰은 무죄를 구형했고, 12월22일 재판부는 무죄를 선고했다. 선고 과정에서 재판부는 “청구인과 변호인의 지난한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고 밝혔다.

무죄는 끝이 아니다. 손옥희는 “서훈 문제와 역사 서술의 바로잡기가 남아 있다”고 말했다. 1947년 변호인단의 기록, 2015년 연구자의 논문, 2025년 변호인의 재심이 이어져 도달한 판결이다. 이제 공은 국가와 시민사회로 넘어왔다. 이름을 되찾은 역사 앞에서, 남은 책임을 묻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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