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의 기억(미꾸라지의 추억)

‘우루루 쾅!’

찢어질듯 가슴을 울리는 소리에 잠이 깼다. 시계를 보니 새벽 5시 38분. 창문을 스치는 번개가 방 안을 하얗게 비추었다가 이내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500미터도 채 안 되는 낮은 하늘에서 가까운 곳에 떨어지는 벼락은 마치 하늘이 화를 참고 있다가 한꺼번에 풀어내는 듯했다. 그 뒤를 이어 땅속까지 흔들리는 천둥이 연달아 터졌다. 자연의 힘이 이토록 가까이 다가온 적이 있었던가. 괜스레 지난날의 허물까지 떠올라 마음 한 켠이 움츠러들었다. 역시 인간은 죄짓고는 살지 못하는 모양이다. 먹물 같은 시커먼 구름들은 천둥과 번개를 품은 채 쉼 없이 북쪽을 향해 달려갔다. 무언가를 쫓는 것인지, 무언가에 쫓기는 것인지. 그 하늘을 바라보며 구름이 지나간 자리에 어떤 아침이 펼쳐질까 문득 궁금해진다.

어린 시절 같았으면 이런 날은 참으로 신나는 날이다. 비가 오면 농사일을 쉬어도 되었기 때문이다. 논으로, 밭으로 그리고 산으로 늘 불려 다니던 농사꾼의 아이가 잠시 자유를 얻는 날이다. 비 오는 날 만큼은 마음껏 놀 수 있는 선물 같은 시간이다. 나는 제법 농사일이 많은 부농의 아들로 자랐다. 봄이 오면 모판을 나르고, 여름이면 잡초를 뽑고, 가을이면 벼를 묶었다. 사계절이 바뀌듯 일도 늘 바뀌었다. 그런 나에게 비 오는 날은 큰 선물이었다. 비오는 날이면 나는 미꾸라지를 잡으러 간다. 갑작스레 쏟아진 비로 도랑물이 불어오르면, 나는 작은 그물 하나 들고 동네 앞으로 달려간다. 허리께를 스치는 풀잎들(여뀌, 방동사니, 창포 등)을 헤집으며 그물을 받쳐 들면 물살 속에서 번쩍이며 움직이는 미꾸라지들이 몇 마리씩 한꺼번에 그물 안으로 들어왔다. 손끝에서 꿈틀대는 그 힘, 빠져나가려 몸부림치던 미꾸라지의 촉감은 지금도 생생하다. 한참만 하면 바구니 하나를 금세 채울 수 있었다. 어떤 녀석은 굵기가 뱀인지 장어인지 헷갈릴 정도이다. 그런 건 어른들 술상에 올라가 구워진 채 향긋한 연기를 피워 올린다.

잡은 미꾸라지는 곧장 요리되지 않는다. 우리 집 장독대에는 아이 키만큼 큰 장독이 몇 개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늘 미꾸라지들이 가득했다. 장독 속에서 며칠 지나면 미꾸라지는 속의 불순물을 토해 내고 맑은 몸으로 변한다. 그때서야 조금씩 건져 올려 추어탕을 끓인다. 소금을 뿌리고 뚜껑을 덮으면 냄비 안에서 들려오는 미꾸라지의 몸부림은 지금 돌이켜 보면 조금 잔인하기도 생각된다. 하지만 그 과정이 지나야 부드럽게 풀어지는 살과 깊은 맛이 완성된다. 토란과 시래기 때로는 소곱창을 넣고 오래도록 푹 끓이면 냄비 위로 진한 향이 피어 오른다. 된장을 한 숟갈 풀고, 마지막에 산초를 살짝 뿌리면 비로소 완성. 식탁 앞에서 뜨거운 국물을 한술 떠넣으면 속 깊은 곳까지 삶이 데워지는 느낌이다.

어른이 된 뒤에도 그 미꾸라지의 추억을 잊지 않고 살았다. 아이들에게 돈 몇 푼을 쥐여주면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어디선가 기가 막히게 미꾸라지를 잡아 온다. 도시 한복판이었지만 내 자취방에는 늘 커다란 항아리가 있었고 그 안에는 미꾸라지가 살았다. 때로는 미꾸라지를 두부 속에 넣어 찌기도 하고 바삭하게 튀기기도 해서 먹었다. 통째로 익혀 갈아서 넣은 추어탕은 유난히 깊은 맛이 난다. 돌아보면 미꾸라지는 내 삶의 식탁과 추억을 동시에 채워 준 존재였다. 결혼을 하고 두 아이를 낳았지만 한참 동안은 혼자 지내는 시간도 길었다. 젊을 땐 자유라고 여겼던 그 생활이 나이가 들수록 조금은 쓸쓸하게 느껴졌다. 사람은 결국 함께 어울려 살아야 비로소 편안해지는 존재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평범함을 거스르지 않는 삶이 어쩌면 가장 인간적이고 가장 행복한 길인지도 모르겠다.

갑자기 비가 쏟아져 내리는 오늘 같은 날이면 마음이 먼저 고향의 도랑으로 달려간다. 손에 그물을 들고 풀잎을 헤치며 물살 속을 들여다보던 그때의 나. 비 냄새와 흙냄새, 천둥소리와 함께 섞여 있었던 어린 날의 자유가 아직도 내 가슴 어딘가에서 조용히 숨 쉬고 있다. 비가 오는 아침이면 나는 여전히 속으로 중얼거린다. 오늘, 미꾸라지 잡으러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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