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딥시크가 흔든 수천억달러 투자 공식
인공지능(AI) 산업의 경쟁 기준이 ‘최고 성능’에서 ‘성능 대비 비용’으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 중국 AI 기업 딥시크가 미국 최상위권 모델과 일부 성능 평가에서 경쟁하면서도 이용료를 수십분의 1 수준으로 낮춘 신제품을 내놓으면서다. AI 데이터센터에 천문학적인 자금을 쏟아붓고 있는 미국 빅테크의 투자 공식에도 다시 물음표가 붙을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딥시크는 17일 ‘DeepSeek-V4.1-Flash-1017’을 공개했다. 지난달 출시한 V4.1-Flash의 개선판으로 코딩과 AI 에이전트 기능을 대폭 끌어올렸다. 회사가 공개한 벤치마크에 따르면 DeepSWE v1.1 점수는 77.0점, Terminal-Bench 4.0은 기존 31.2점에서 42.3점으로 상승했다. 웹 검색과 데이터 수집 기능을 사용할 수 있는 API도 개방했다.
핵심은 가격이다. 딥시크의 비혼잡 시간대 API 출력 가격은 100만 토큰당 0.6달러다. 혼잡 시간에도 1.2달러에 불과하다. 성능 개선에도 가격을 올리지 않았다. AI 업계에서 모델 성능 향상이 곧바로 높은 이용료로 연결되던 기존 공식과 다른 행보다.
딥시크가 보여주는 것은 단순한 ‘싼 AI’가 아니다. 적은 연산 자원으로 어느 수준까지 높은 성능을 구현할 수 있느냐는 자본효율 경쟁이다. V4.1-Flash는 입력 단계에서 80억개, 출력 단계에서 160억개의 매개변수만 활성화하는 구조를 적용했다. 이전 세대보다 KV 캐시에 필요한 HBM을 4분의 1 수준으로 줄였다는 게 회사 측 설명이다.

이는 AI 산업의 투자 논쟁과 직결된다. 미국 빅테크는 더 많은 GPU와 데이터센터, 전력을 확보하는 방식으로 AI 주도권 경쟁을 벌여왔다. 하지만 비슷한 수준의 작업을 훨씬 낮은 비용에 처리하는 모델이 확산하면 ‘더 많은 컴퓨팅 자원을 확보해야 더 강한 AI를 만들 수 있다’는 논리에 균열이 생길 수 있다.
딥시크는 이미 한 차례 시장에 이런 질문을 던졌다. 지난해 R1 공개 당시 저비용 고성능 AI에 대한 충격으로 엔비디아를 비롯한 AI 관련주가 크게 흔들렸다. 이번에는 모델 성능 자체보다 비용 구조가 더 주목받고 있다는 점에서 파장이 달라질 수 있다.
다만 딥시크가 공개한 성능 수치는 자체 평가 결과인 만큼 외부 검증이 필요하다. 일부 벤치마크에서 미국 주요 모델을 앞섰다고 해서 전체적인 성능 우위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성능 격차를 좁히면서 가격까지 빠르게 낮추고 있다는 방향성 자체는 AI 시장의 경쟁 구도를 바꾸기에 충분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반도체 산업에는 양면적인 변수다. 저비용 모델이 확산되면 AI 기업이 같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필요한 고가 GPU와 HBM의 양이 줄어들 수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AI 메모리 공급업체에는 부담 요인이다.

반대 시나리오도 있다. AI 가격이 낮아지면서 이용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할 가능성이다. 기술 효율이 높아질수록 오히려 전체 소비량이 늘어나는 ‘제번스의 역설’이 AI 시장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 모델 한 번을 돌리는 비용은 내려가지만 기업과 개인이 AI를 훨씬 자주 사용하면서 전체 연산 수요는 오히려 커지는 구조다.
한국에는 더 복잡한 숙제를 던진다. 중국의 AI를 따라잡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수 있어서다. 한국이 대규모 투자를 통해 모델 성능을 끌어올리는 동안 중국 기업이 성능과 비용을 동시에 개선하면 추격해야 할 목표 자체가 계속 움직이게 된다.
결국 AI 패권 경쟁의 질문도 달라지고 있다. ‘누가 가장 똑똑한 AI를 만드느냐’에서 ‘누가 충분히 똑똑한 AI를 가장 싸게 공급하느냐’로의 변화다.
딥시크가 다시 시장에 던진 충격은 성능 몇 점의 차이가 아니다. AI 산업에서도 결국 기술력만큼 중요한 것은 원가 경쟁력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