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멸망은 단순한 전쟁 패배가 아니라 20여 년간 누적된 내치 붕괴와 외교 실패가 맞물리며 발생한 구조적 파국이었다는 평가가 갈수록 힘을 얻고 있다. 의자왕 시기 백제 조정은 부정부패와 권력 집중으로 충신을 잃었고, 지방 지배력은 누수되면서 국정 통제 기능이 급격히 약화됐다. 내부 기반이 흔들린 상황에서 신라·당 연합군이 형성되는 국제 정세 변화마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 치명타가 됐다.
642년 의자왕 즉위 직후의 정치 숙청과 부여씨 왕족·지방세력 견제가 과도하게 진행되면서 왕권은 강화됐지만 동시에 국정 운영의 균형추가 무너졌다. 신라와의 전쟁이 거듭되는 동안 조정은 국방 체계를 정비하기보다 권력 유지에 치중했다는 지적이 많다. 결국 전세가 기울기 전에 내부 배신으로 의자왕이 예식진에게 사로잡혀 당군에 넘겨지는 상황까지 발생했다. 전통 강국으로 알려진 백제가 정작 본격적인 결전 이전에 국왕이 포로가 되는 장면은 체제 붕괴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외교전에서도 백제는 치명적인 오판을 거듭했다. 고구려·일본과의 삼각 공조를 유지하는 데 실패했고, 신라가 사실상 수십 년에 걸쳐 당과의 연합을 추진해 왔다는 사실을 제대로 포착하지 못했다. 김춘추는 640년대 이후 고구려·일본·당을 오가며 백제 견제를 위한 외교 네트워크를 구축했지만 백제 조정은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후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하는 김법민(문무왕)이 백제에 품은 복수심은 《삼국사기》의 기록을 통해 확인된다. 김법민은 항복해 온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을 꾸짖으며 “너의 아비가 20년 전 내 여동생을 억울하게 죽여 옥에 묻었다”고 질타했다. 두 나라 사이의 감정 골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수준이었음을 보여준다.
백제가 당과의 관계에서도 결정적 신호를 놓쳤다는 분석도 나온다. 641년 무왕 사망 당시 당 태종이 조서를 보내 애도할 정도로 양국 관계는 우호적이었다. 그러나 의자왕 집권 이후 대당 외교는 급속히 약화됐고, 결국 660년 백제 멸망의 직접적 원인이 된 군사적 개입을 막지 못했다. 20년간의 내치 혼란과 외교 고립이 한 번에 폭발한 셈이다.
백제의 명운이 다한 뒤 의자왕이 포로로 끌려가 사망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부여융은 이후 당에서 상당한 대우를 받으며 생을 이어갔다. 국가의 멸망과는 별개로 왕족 일부는 새로운 질서 속에서 비교적 안정된 삶을 살았다는 점이 역사의 아이러니로 남는다.
백제 멸망, 결국 내치 붕괴와 외교 실패가 부른 비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