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설픈 엄빠들_20년 만의 해후
평소 후배 교사들에게 <자신의 약점이나 단점을 인정하는 것도 용기다. 자신의 약점과 단점을 인정할 때 거기서부터 약점과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라고 말해 온 나로서 교사 2년 차에 교육청 장학사 및 장학관들까지 참관하는 오픈 연구수업에서 서울시 최우수 연구수업으로 선정되면서 우수 연구수업 교재를 집필하거나 각종 언론 인터뷰, 그리고 EBS 감수 교사 등 일련의 활동 등은 나 자신의 역량에 비해 과잉 평가를 받는다는 부담이 컸다. 게다가 강남을 중심으로 조기 교육이 붐을 일으키면서 10년 후면 내가 근무하는 강북에도 조기 교육 바람이 불어올 것이고, 그때 영어 교사로서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는 현직 영어 교사로서 10년 후를 준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해외여행조차 경험하지 못한 나에게 (유학) 휴직과 함께 유학을 떠나는 것은 일종의 무모한 도전에 가까운 모험이었다. 특히 음식에 관한한 한국 음식 중독자인지라 느끼한 미국 음식을 주식으로 한다는 건 두려움 그 자체였다. 햇반을 포함한 한국 음식을 최대한 많이 싸서 들고 도착한 오클라호마는 다행히 한국 마트가 3개나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살아남을 수 있게 되었다. 기숙사 생활을 하는 동안 한국 유학생 커뮤니티에는 mba를 전공하는 동년배의 친구가 정성을 다해 도와주었다. JK Lee라는 친구 이야기다. 아직은 차가 없는 나를 한국 마트를 오갈 때 픽업을 해주기도 하고, 미국에서는 물과 공기만큼이나 필수품인 차량 구입도 도와주고, 교회를 소개해 주는 등 너무도 많은 도움을 준 참 고마운 친구였다.
JK는 내가 평생 고마워해야 할 좋은 본을 보여준 친구였다. 나의 딸들과 비슷한 연배의 두 딸을 데리고 유학 생활 중이었다. 나에게는 충격이었다. 대부분의 한국 유학생은 기러기 아빠가 돈을 벌고, 아내가 아이들과 함께 외국에서 유학을 하는 게 트렌드였던 시기에, 기러기 아내를 두고 아빠가 자녀와 유학생활을 하다니!!! 나에게는 엄청난 희망의 도전이었다. JK 따라하기 유학 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음식을 포함한 미국의 시스템에 따른 자녀의 학교생활 적응 지도 등 많은 부분에서 서로 도움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동고동락하게 되었다.
1년 반의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나와는 달리 JK는 미국에서 mba를 졸업하고 간호학을 추가로 공부하여 미국의 국가직 간호사가 되었다. 그 후 간호사였던 아내도 합류하고 아이들 또한 미국 생활에 잘 적응하여 미국의 주류 사회에 편입하였다고 한다. JK의 두 딸 또한 치과의사와 약사가 되어 가족 모두가 의료인이 되었다. 소위 말하는 American Dreamer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축하는 물론 찬사의 박수를 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멋진 결실이다. 그렇게 아메리칸드림을 이룬 JK가 한국을 일시 방문하게 되었다.
귀국 기간에 꼭 만나고 싶은 유학 동기를 알려달라고 하니 두어 명은 같이 만났으면 좋겠다고 했다. 테너 홍은 투병 중인 아내를 봉양하기 위해 명퇴를 하고 집을 비우기 곤란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JK의 귀국 소식에 멀리하는 아들이 온 덕에 충남 당진에서 불원천리 먼 길을 달려왔다. 감동이다. <신속 부정확> 유샘은 여전히 상큼 발랄 총명함 그 자체였고, Door to the moon 샘은 갑자기 독감이 찾아와 안타깝게 불참하셨다.
유학을 마치고 간호사가 되어 시민권이 있는 JK와 달리 나머지 3명은 모두 귀국하여 교직으로 복귀하였다가 작년과 올해 2월을 끝으로 3명 모두가 교육 현장에서 은퇴한 야인이 되었다. 한국의 아파트에 비하면 빈민촌 같던 아파트 생활, 자동차 바퀴 한 개가 밤새 도난당한 어이없던 이야기, 김밥 한 줄에 감동한 이야기 등 식사로 모였지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20년 만의 추억담을 20년 전의 나이와 열정으로 쏟아냈다. 초등 및 중학교 학생들 둔 유학생이자 학부모인 엄빠들의 이야기는 그렇게 웃음과 탄식의 추억 잔치였다.
JK가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면 언제 다시 만나게 될지 모른다. 아쉬움에 서로 허그를 한다. 유학파라 할지라도 한국 사람끼리는 허그가 되지 않는 문화에 살다가 허그조차도 추억의 바디 랭귀지가 된다. 모든 게 추억이고 그리움이고 아쉬움이다. 20년의 간극을 극복하지 못하여 만나고 싶지 않았다거나, 만남이 부담스럽다면 얼마나 어색했을까? 해어지고 나서도, 시간이 흘러도 만나고 싶은 사람들이었다. 그래 이게 사람이지! 사람이 사람을 그리워하지 않으면 그건 사람이 아닌 거지. 오늘도 사람을 그리워하고, 그리운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서로 행복해하며 감사의 이별 악수를 한다. 회자정리라고 했으니 언젠가(?) 또 만나겠지? 안녕 JK.

<유학의 추억이 서린 Oklahoma City Univers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