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어귀의 고향 추억

겨울이 문턱에 다가서는 날 아침. 앞이 보이지 않는 자욱한 안개를 헤치며 출근길에 나선다. 자동차 전조등 불빛조차 흐릿하게 번지는 길 위에서 문득 삶도 이 안개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 눈앞의 한 걸음조차 분간하기 어렵다. 하지만 학교에 도착하는 순간 모든 것은 달라진다. 운동장 한쪽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맑은 웃음소리가 안개를 밀어내고 마음속까지 환하게 비춘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면 어느새 유리창 너머로 고향의 햇살 같은 따뜻한 빛이 스며든다. 그 햇살은 어린 시절 뛰놀던 고향의 들녘과 마을 풍경이다.

내 고향의 하늘은 유난히 맑고 선명하다. 도시에서는 보기 힘든 깊고 푸른빛이 하늘 가득 펼쳐진다. 늦가을이 지나 겨울이 다가오면 학교 운동장에는 서리와 안개에 젖은 은행잎들이 노랗게 쌓인다. 프라타너스 잎도 누렇게 물들어 바람에 이리저리 흩날린다. 수업이 끝난 뒤 친구들과 낙엽을 모아 태우곤 했는데,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연기와 함께 전해지는 따뜻한 온기는 차가운 겨울 아침을 잊게 만든다. 낙엽 타는 냄새는 지금도 내 기억 속에 가장 진한 고향의 향기로 남아 있다.

고향의 하늘은 계절이 바뀔수록 더욱 높아 보인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면 마음속까지 맑아지는 기분이 든다. 고향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신기한 힘을 가지고 있다. 공부와 일에 지쳐 복잡해진 머릿속을 맑게 해 주고, 답답한 마음을 씻어 준다. 도시의 매연과 소음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도 고향 바람은 쉼표 같은 존재이다. 마치 자연이 건네는 위로처럼 조용히 다가와 마음의 먼지를 털어내 준다. 그 바람이 어디에서 시작되어 어디로 흘러가는지는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바람이 스쳐 지나간 자리마다 고향의 냄새가 묻어나는 것만은 분명하다.

가을 추수를 마친 논은 텅 빈다. 황금빛 벼가 넘실거리던 들판은 어느새 적막한 겨울 풍경으로 변해 버린다. 빈 논은 왠지 모를 쓸쓸함을 안겨 주지만, 그 한편에서는 김장배추와 무가 푸른 잎을 자랑하며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겨울을 준비하는 바쁜 농부들의 손길이 남아 있는 풍경이다. 해 질 무렵이 되면 고향은 또 다른 모습을 보여 준다. 붉게 물든 노을은 도시에서 보는 노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다.

사람들이 하나둘 도시로 떠난 뒤 비어 버린 마을에는 허물어져 가는 빈집들이 남아 있다. 마당 한구석의 감나무는 잎을 모두 떨군 채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고 있지만, 그 가지 끝에는 잘 익은 홍시 몇 개가 빨갛게 매달려 고향을 지킨다. 붉은 홍시 사이로 보이는 노을은 마치 한 폭의 그림 같다. 그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면 떠나온 세월과 그리운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둘 떠오른다. 고향은 변해 가고 있었지만, 그리움만은 변하지 않은 채 마음속에 깊게 자리하고 있다.

내 고향은 위수천 강을 품고 하얀 갈대숲이 넓게 펼쳐져 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갈대들은 서로 몸을 기대며 은빛 물결을 만든다. 갈대숲 옆에는 백로들이 둥지를 틀고, 하얀 날개를 펴고 하늘로 한꺼번에 비상하는 모습은 한 폭의 그림처럼 장관이다. 강가를 따라 걷다 보면 갈대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와 물 흐르는 소리가 어우러져 한 편의 겨울 교향곡처럼 들려온다.

해마다 겨울 언저리가 되면 고향은 조용히 겨울나기를 준비한다. 들판은 비워지고, 나무들은 잎을 떨구고, 갈대는 더욱 희어져 간다. 하지만 그 속에는 새로운 봄을 기다리는 생명의 숨결이 숨어 있다. 어린 시절의 추억과 가족의 온기 그리고 변함없이 나를 품어 주는 고향의 풍경도 함께 살아 숨 쉬고 있다. 겨울 어귀에 서면 나는 늘 고향을 떠올린다. 맑은 하늘과 차가운 바람, 낙엽 타는 냄새와 붉은 노을, 위수천의 갈대숲까지. 이 모든 풍경은 세월이 흘러도 내 마음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그 기억들은 오늘도 삶의 안개 속을 걸어가는 나에게 따뜻한 햇살이 되어 길을 비춰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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