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일 앞에서 더욱 빛나는 일본의 질서 의식

일본 친구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종종 이런 말을 듣는다. “더 이상 갈 곳이 없으니까…”, “어떻게 해도 안 되니까….” 처음에는 그 말이 쉽게 포기하는 태도처럼 들렸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말 속에는 일본이라는 나라가 처한 지정학적 현실이 담겨 있다. 섬나라 일본에서 정말 큰 일이 벌어지면, 일본인들은 어디로 도망갈 곳이 없다. 다른 나라처럼 국경을 넘어 피할 수도 없고, 결국 그곳에서 버텨야 한다. 그런 상황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일본 사람들은 때로 체념에 가까운 수긍을 보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쩔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일까. 일본인들은 대체로 지도자의 말을 잘 따르고,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내세우지 않는 편이다. 무엇을 결정할 때도 혼자 앞서기보다는 여러 사람의 의견을 모아 천천히 움직인다. 작은 일 하나를 실천하는 데도 시간이 오래 걸리고, 충분히 논의한 뒤에야 행동한다. 절대로 서두르지 않는다. 어쩌면 이러한 모습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일본의 질서 의식’으로 보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일본인들도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 인간적인 모습들을 많이 발견하게 된다.

예를 들어 도쿄에서는 한때 생필품을 구하기 어려운 상황이 있었다. 공급은 충분하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물건이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겉으로는 모두가 차분하게 줄을 서고 질서를 지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발 빠른 사람들은 이미 필요한 물건을 미리 확보해 두고 있었다. 또 도쿄를 떠날 수 있는 사람들은 조용히, 아무 소리 없이 오사카나 남쪽 지방으로 이동해 있었다. 회사 때문에 도쿄를 떠날 수 없는 경우에도 아이들은 이미 다른 지역이나 제3국으로 보내 놓은 경우가 많았다. 졸업 시즌이었지만 정작 졸업식에는 아이들이 없는 학교도 있었다. 우리처럼 크게 떠들지는 않지만, 뒤에서는 각자 살아갈 길을 찾고 있는 것이다. 다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 일본인들의 모습을 한마디로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일본에서 10년 넘게 살았지만 여전히 그들의 속마음을 완전히 이해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일본의 질서 의식에 놀라곤 한다. 특히 2011년 3월 11일, 규모 9.0의 대지진과 거대한 쓰나미가 일본을 덮쳤을 때 세계 언론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2만 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한 비극 속에서도 일본 사회는 놀랄 만큼 질서 정연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보도가 이어졌다. 솔직히 한국과 비교해 일본이 더 질서 정연해 보인다는 말에 굳이 반박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한 가지 질문은 남는다. 과연 그 질서는 겉모습뿐일까, 아니면 그 내면에서도 그대로 유지되는 것일까? 일본인들도 결국 인간인데, 죽음 앞에서까지 완전히 초연할 수 있을까? 나는 일본에서 살아오며 그 이유를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그 힘의 상당 부분이 교육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르렀다.

사람들이 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모습

한때 나는 아들을 일본의 소학교에 보낸 적이 있다. 운동회에서 달리기를 하는데 남학생과 여학생이 함께 섞여 키 순서대로 줄을 서서 달리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공연을 할 때도 특별히 잘하는 몇 명만 무대에 올리는 것이 아니라, 학급 전체가 함께 올라간다. 한국의 학교에서는 작은 재능이라도 발견되면 상장을 주고 개인의 성취를 강조하고 칭찬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일본 학교에서는 상장을 찾아보기 힘들다. 개인의 뛰어남보다는 ‘모두 함께’라는 가치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학교 규칙을 조금이라도 어기면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다. 고쳐질 때까지 반복해서 가르치고 또 가르친다. 적당한 타협이나 포기는 있을 수 없다. 한두 사람의 뛰어남을 인정하기보다는, 모두가 같은 방향으로 함께 가는 것을 의무교육 내내 강조하는 것이다.

아이들은 태어나 가정에서부터 시작해 보육원,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까지 이어지는 교육 과정 속에서 끊임없이 “스미마셍(죄송합니다)”이라는 말을 배우며 자란다.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을 무엇보다 부끄럽게 여기도록 교육받는다.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것이 삶의 기본이라는 생각이 몸에 배인다. 어쩌면 바로 그 점이, 일본 사회가 큰 재난 앞에서도 놀라울 만큼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죽음이 눈앞에 있는 상황에서도 “남에게 피해를 주지 말아야 한다”는 오랜 교육과 습관이 사람들의 행동을 붙잡아 두는 것은 아닐까? 물론 일본인들도 우리와 같은 평범한 인간이다. 두려움도 있고, 살기 위해 조용히 길을 찾기도 한다. 그러나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된 공동체 의식과 교육은 위기의 순간에 그들을 질서 속에 머물게 한다. 그래서인지 큰일이 닥쳤을 때 일본 사회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혼란이 아니라 조용한 질서다. 그 질서의 겉과 속을 모두 이해하기는 아직도 쉽지 않지만, 분명한 것은 그 질서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의 교육과 사회적 습관 속에서 길러진 결과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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