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숭아 향이 지나간 자리

“이눔아! 너 어찌 이런 일을…!” 아버지의 호통과 함께 지게작대기가 허공을 갈랐다. “아이고, 아부지! 잘못했어요. 다신 안 그랄께요!” 나와 두 살 아래 동생은 납작 몸을 낮췄다. 아버지의 지게작대기를 피해 땅바닥에 엎드린 채 용서를 빌었다. 아버지는 분이 풀리지 않으셨는지, 망태기에서 튀어나온 복숭아를 지게작대기로 연신 내리치고 계셨다. 그때였다. 짓이겨진 복숭아에서 퍼져 나온 향기가 엎드린 내 얼굴로 흘러들어왔다. 콧속을 파고드는 그 향은 낯설고도 달콤했다. 나는 벼농사를 짓는 시골에서 자라 과일과는 인연이 멀었다. 5학년이 되어서야 동네 부잣집 회갑잔치에서 ‘미깡’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제주감귤을 맛보았다. 복숭아라 해봐야 산에서 자생적으로 자란 털 많고 떫은 개복숭아의 경험이 전부였다. 그런데 그날 맡은 천도복숭아 향기는 내가 알던 어떤 과일의 향기와도 달랐다.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도 입안 가득 침이 고였다.

우리 집은 벼농사와 보리농사 그리고 약간의 찹쌀과 밀 농사를 짓는 전형적인 집안이었다. 아버지는 2차 세계대전 중 일본으로 강제 부역으로 끌려가셨다가 해방 후에야 돌아오셨다. 해방 후 바로 돌아오시지 못하고 4년 동안 일본에서 모은 돈으로 이곳 고향의 농지를 장만하셨다. 한때는 하인을 넷이나 둘 만큼 살림이 넉넉했다. 열 남매를 모두 농사 하나로 대학까지 보냈다. 지금도 떠오르는 기억 중의 하나는, 한 달에 두 번 소 등에 쌀가마니 두 개를 얹어 이십리 길을 걸어 대한통운을 통해 형들이 공부하는 도시로 보내던 모습은 아직도 생생하다. 하지만 과일 농사는 남의 이야기였다. 그래서였을까. 과일에 대한 동경은 늘 마음에 남아 있었다.

복숭아 나무의 가지에 매달린 붉은 복숭아의 모습.

“히야, 나 복숭 먹고 싶어.” “야! 복숭이 어데 있노?” “저기 과수원에서 쌀이나 보리 가져오면 복숭 준다 카더라.” 동생과 나는 잠시 서로 눈을 마주 보다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광으로 달려갔다. 당시 시골에는 값나가는 보물들은 모두 광에다가 보관했다. 가져갈 수 있는 건 얼마 전 수확을 마친 보리뿐이었다. 둘이는 자루에 보리를 다섯 되쯤 담았다. 혹시라도 들킬까 번갈아 망을 보며 뒷산 과수원으로 달렸다. 반 자루 남짓한 보리를 건네자 놀랍게도 복숭아를 한 자루 가득 안겨준다. 우리 둘이는 산 중턱에 앉아 초록빛으로 물든 들판을 바라보며 주먹만 한 천도복숭아를 먹었다. ‘꿀맛’이라는 표현이 바로 이럴 때 쓰는 말이리라. 정신없이 먹다 보니 열 개는 족히 먹은 거 같다. 배가 부른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그만 잠이 들었다.

해가 서산으로 기울 무렵, 불안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오다 아버지와 마주치고 말았던 것이다. “아부지…! 용서해주이소. 다신 안 그라께요!” 손발이 닳토록 둘이는 빌었다. 어쩐지 조용한 것이 이상해 고개를 드니, 아버지는 벌서 앞서 걸어가고 계셨다. 말없이. 우리는 흩어진 복숭아를 주섬주섬 자루에 담아, 한참 떨어진 거리에서 아버지의 등을 따라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해 어머니께 다시 목숨만 부지할 정도로 맞은 매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 당시의 모습이다. 지금도 파란 하늘을 올려다볼 때면 그날이 떠오른다. 지게작대기에 짓이겨진 복숭아의 향기 그리고 동생과 나란히 앉아 나누던 사소한 이야기들…. 지금도 잊혀지지 않고 가슴에 남은 것은 달콤한 복숭아의 맛이 아니라, 그 시절의 가난과 욕심 그리고 말없이 앞서 걷던 아버지의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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