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느리지만 철저한 진화—보온 도시락에서 일본의 AI까지

검고 큼직한 일제 코끼리표 보온 도시락통이 있었다. 80~90년대에 학교를 다녔다면 손에 익은 그 덩치, 겨울이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던 그 통의 감각이 남아 있다. 90년대에는 귀여운 흰색 모델도 보였지만, 기억 속 색상은 대체로 ‘시꺼멓다’에 가깝다. 그 통을 들고 다니던 어깨의 무게마저도 한 시대의 생활 감각이었다.

일본에 살다 보니 아침에 중학생 아이들 도시락을 여럿 싸게 되었다. 날이 차가워질수록 밥은 금세 식고, 고기는 하얗게 굳는다. 그럴 때면 문득 코끼리표 보온 도시락이 떠오른다. 마침 가게 진열대에서 코끼리표 보온 도시락을 아직도 파는 걸 보았다. 반가운 마음에 손이 갔는데, 크기가 많이 작아져있었다. 그 옆에는 요즘 타입의 보온 도시락이 눈에 들어왔다. 써모스(Thermos) 계열 제품이었는데, 그 구조가 낯설 만큼 달라져 있었다.

예전에는 밥통이나 국통이 작고, 보온 외통은 분리 세척이 어려웠다. 안에 든 용기만 따로 씻고, 외통은 닦아내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지금 제품은 겉의 스테인리스 외피가 통째로 분리되고 내부 구성품이 모두 해체된다. 모듈식으로 빠졌다 끼웠다 하니 관리가 쉬워졌고, 식기세척기, 전자레인지도 사용 가능하며, 위생에 대한 불안도 사라졌다. ‘보온’보다 ‘사용 경험’을 중심에 둔 변화가 체감됐다.

형태도 크게 바뀌었다. 예전엔 동그란 원통형이 세로로 길어 가방에 넣기 불편했고, 대개 따로 들고 다녀야 했다. 요즘 타입은 밥통은 여전히 원형이지만 반찬통은 네모로 바뀌어 옆에 딱 맞게 붙는다. 전체는 가로형 직사각 구조라 부피가 줄었고, 가방에 넣고 빼기도 수월하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변화다. 작고 가볍게, 그러나 필요한 온도는 지키는 방식으로 진화한 셈이다.

생활 도구는 잘 안 바뀌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느리게 그리고 생활의 리듬에 맞춰 변한다. 일본의 속도는 종종 ‘느리다’고 평가되지만, 그 느림은 대체로 철저함과 함께 간다. 보온 도시락의 변화를 보며 그 생각이 또렷해졌다. 설계의 의도, 세척의 동선, 가방에 들어가는 실측—이 모든 걸 허투루 넘기지 않는 태도다.

AI도 비슷하다. 일본의 AI 보급은 한동안 더디게 보였다. 그러나 최근 도쿄 곳곳에서 AI 이벤트가 늘고, 이를 서비스로 연결하는 기업들이 빠르게 늘어나는 걸 체감한다. 일본 특유의 신중함이 초반 보급을 늦추는 듯하지만, 일단 ‘들어간다’고 정하면 누구보다 철저히 대비한다. 표준을 정리하고, 현장 프로세스를 맞추고, 위험을 점검한다. 그 과정이 길어 보일 뿐 방향은 분명하다.

앞으로가 흥미롭다. 일본은 애니메이션과 게임, 캐릭터 IP를 비롯해 제작 역량의 저변이 두텁다. 여기에 생성·편집·관리의 AI 기술이 더해지고, 업계 종사자 다수가 실제 업무 흐름에 맞춰 활용하기 시작한다면 보급과 성능의 상승 곡선은 가파를 것이다. 섬세함과 꼼꼼함이 단지 ‘느림’이 아니라 ‘완성도’로 번역될 때, 시장은 오히려 크게 움직인다.

검은 원통에서 분리형 가로형으로의 변화가 일상의 불편을 줄였듯, 일본의 AI도 ‘가방에 잘 들어가는’ 형태—현장의 시간표와 규격에 딱 맞는 형태—를 찾아갈 것이다. 느리지만 철저한 진화, 그 끝은 대개 납득할 만한 품질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송원서 (Ph.D.)

슈메이대학교 전임강사 / NKNGO Forum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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