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래전 기억 속에서 하나의 장면을 떠올린다. 1980년대 말, 미국으로 이민을 간 친척 중 한 명이 1990년대 초 한국을 방문했을 때 나에게 여러 가지 문구류를 선물해주었다. 당시 한국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3M의 포스트잇과 포스트잇 플래그(Post-it Flag)들이었다. 그중 유독 많이 받았던 것은 ‘Zoloft’라는 글자가 찍힌 포스트잇이었다. 나는 그 의미를 알지 못한 채, 그저 한국에서는 구할 수 없는 희귀템이라며 교과서 곳곳에 붙이고 공부할 때 유용하게 썼다.
그런데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그 ‘Zoloft’라는 이름이 바로 Pfizer의 항우울제 졸로프트(성분명: 설트랄린)의 브랜드명이었다는 것을. 지금은 한국에서도 흔히 쓰이는 약이지만, 이미 30년 전도 훨씬 전에 미국에서는 적극적인 프로모션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단순히 문구류 사은품일 뿐이라 생각했던 그 물건이 사실은 거대한 제약 시장과 맞닿아 있었다는 사실은 나에게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생각해보면, 그것은 미국 사회가 이미 오래전부터 우울증이라는 질환과 정면으로 맞서왔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종종 미국의 대중문화나 광고 속에서 밝고 웃음 가득한 이미지를 떠올리지만, 그 이면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우울증과 싸우며 살아가고 있었다. 우울증은 특정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라, 누구나 겪을 수 있는 ‘마음의 감기’라는 점을 오늘 새삼 다시 느낀다.
더구나 요즘 한국에서도 청소년들이 입시나 사회적 압박 속에서 이런 약을 복용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 한다. SNS가 발달하면서, 우리는 타인의 ‘가장 빛나는 순간’들을 실시간으로 보게 되고, 상대적 박탈감과 상실감이 더 쉽게 마음에 스며든다. 비교 속에서 스스로의 가치를 깎아내리게 되는 구조가 우울증을 더 보편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 옛날 간호학을 공부하던 친척이 무심코 건네주었던 프로모션 포스트잇이 사실은 거대한 사회적 풍경을 담고 있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는다. 우울증은 한국, 일본, 미국을 막론하고 누구나 마주할 수 있는 문제다. 중요한 것은 이 병을 부끄럽게 숨기는 것이 아니라, 치료받고,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찾아가는 일이다. 포스트잇 위에 적힌 그 낯선 이름이 나에게 지금 남긴 메시지는 분명하다. 우리는 모두 조금 더 건강한 사회, 마음의 고통을 자연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송원서 (Ph.D.)
슈메이대학교 전임강사 / NKNGO Forum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