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카오산의 가을길에서 만난 지난 삶과 남은 시간
한로가 지났다. 찬 이슬이 내리기 시작하고 가을이 깊어 간다는 절기다. 그러나 요즈음 일본의 날씨는 계절의 순리를 거스르는 듯 한 달이 넘게 비가 이어지는 이상 기온으로 많은 사람들이 걱정을 한다. 그래도 분명 가을은 왔지만 도시의 빌딩 숲과 복잡한 거리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가을은 좀처럼 자신의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날짜로는 계절이 바뀌는 것을 알면서도 계절의 느낌을 느끼지 못하는 삶, 어쩌면 우리 인생도 그런 것이 아닐까.
모처럼 학교 수업이 없는 토요일이다. 사흘간의 연휴가 시작되는 날이기도 하다. 오랜만에 타카오산에 올랐다. 신주쿠역에서 오전 8시 10분 특급열차를 타고 한 시간쯤 달리자 산이 가까워졌다. 다카오산은 휴일이면 만 명이 넘는 등산객과 관광객이 찾는 세계적인 명소다.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으로 등재되어 있으며 오랜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사찰도 자리하고 있다. 해발 600미터 남짓한 산이지만 정상에 이르는 길은 결코 만만치 않다. 편리한 리프트와 등산열차도 운행되지만 산이 품은 진짜 매력은 결국 두 발로 걸어야 만날 수 있다.

오전 9시, 산행을 시작했다. 나만의 비밀 등산로를 걸어 한 시간 반이 조금 지나 정상에 도착했다. 보통은 그곳에서 잠시 쉬었다가 내려오지만 이날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 몸이 허락하는 데까지 걸어 보자는 마음으로 진바산 방향으로 발길을 이었다. 두 시간을 더 걸어 ‘고부토게시로야마’에 도착했다. 내게는 이곳이 천국이다. 몸이 지금보다 건강했던 시절, 나는 한 달에 세 번 이상 이곳을 찾곤 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다리에 힘이 풀릴 만큼 걸어 도착하면 낡은 판잣집의 작은 가게가 나를 기다린다. 오뎅 한 그릇에 700엔, 캔맥주 한 개에 500엔. 그것을 앞에 놓고 멀리 후지산을 바라보는 순간이면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었다. 값비싼 식당도 화려한 여행지도 필요하지 않았다. 땀 흘려 걸어온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소박한 행복이 그곳에 있었다. 나는 그곳을 천국이라고 불렀었다.
돌아보면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천국이 있다. 누구에게는 가족이 있는 집일 것이고 누구에게는 평생 일해 온 직장일 것이다. 또 누구에게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히 걸어온 길일 수 있다. 내게 그 작은 산속 가게는 힘껏 살아온 하루의 보상이었고 아직은 세상 속에서 제 몫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장소였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세 시간 넘게 산길을 걸으니 체력이 바닥났다. 진바산까지 가려던 계획을 접고 역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왔던 길을 그대로 되짚는 대신 다른 등산로를 선택했다. 산을 오를 때는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 중요하지만 돌아올 때는 무사히 내려가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몸으로 배웠다. 가는 도중 행여 내려가는 능선이 나오면 마음을 오히려 불안하다.그 만큼 다시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되니까. 우리네 인생길도 비슷하리라. 얼마쯤 걸었을까 다리에 쥐가 나기 시작했다. 한 걸음 내딛기가 쉽지 않다. 잠시 쉬었다가 다시 걷는다. 몇 걸음 걷다가 멈추고 바위에 앉아 숨을 고른 뒤 다시 일어섰다.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하던 움직임들이 하나하나 힘겨운 일이 되었다. 그때 이어폰을 통해 익숙한 7080 트로트가 들려왔다. ‘세월아, 천천히 가자.’, ‘인생아 너무 애쓰지 마라… 잠깐 멈춰 하늘 좀 올려 봐… 한 번 사는 이 길 위에서 한 번 잠깐 꽃향기 맡아 봐…’ 노랫말이 귀에 들어오는 순간 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이 무너져 내렸다. 눈물이 쏟아졌다. 처음에는 나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다리가 아파서였을까. 지쳐서였을까. 아니면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무언가가 그 노래 한 구절에 건드려진 것일까.
나는 산길 한가운데서 지난 삶을 마주하고 있었다. 세 살 무렵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을 스쳐 갔다. 어린 시절의 기억, 어려웠던 시절의 고단함, 기뻤던 순간들, 가슴 벅차게 행복했던 날들. 그때는 옳다고 믿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아쉬운 선택도 있었고, 조금만 더 잘했더라면 하는 후회도 있었다. 붙잡고 싶었지만 붙잡을 수 없었던 사람과 시간도 떠올랐다. 사람은 바쁘게 살아가는 동안 자신의 인생을 돌아볼 여유가 없다. 해야 할 일이 있고,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있으며, 내일을 위해 준비해야 할 일들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그러다 보면 오늘이 얼마나 소중한 날인지도 모른 채 하루를 보내곤 한다. 그런데 산길에서는 다르다. 앞서가는 사람도 없고, 나를 재촉하는 사람도 없다. 그저 나 자신과 남은 길만 있다. 몸이 느려지자 마음속에 묻어 두었던 기억들이 하나씩 걸어 나왔다.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손으로 닦아도 다시 흐른다. 지나온 세월이 고마워서였는지,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이 서러워서였는지, 그 모든 감정이 뒤섞여 있었는지 알 수 없다. 그저 한 가지 생각만이 간절하다. 십 년만 더 젊었다면. 조금만 더 건강했더라면….

하지만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흐르면서도 누구의 사정도 봐주지 않는다. 돈이 많다고 붙잡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명예가 높다고 늦출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평생을 성실하게 살아온 사람에게도 세상을 바꾸겠다는 꿈을 품었던 사람에게도 시간은 똑같이 흘러간다. 나는 살아오면서 남들처럼 큰돈을 벌지 못했다. 높은 건물을 세우지도 못했고, 세상에 내 이름을 크게 알리지도 못했다. 누군가의 눈에는 평범하고 소박한 삶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내게는 내가 걸어온 나만의 길이 있다. 교육자로서 가르쳤던 제자들이 있고, 함께 웃고 고민했던 동료들이 있으며, 부족한 나를 믿고 따라와 준 가족이 있다. 때로는 뜻대로 되지 않아 힘들었고, 때로는 내가 조금 더 잘했어야 했다는 후회도 남는다. 그렇지만 적어도 내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려 했고,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않으려 했으며, 내가 옳다고 믿는 길을 걸으려 애썼다.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직은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다. 사람은 나이가 들어도 완성되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지나온 날을 돌아보면 늘 부족한 점이 보이고, 남은 날을 생각하면 아직 해야 할 일이 떠오른다. 다만 이날 산길에서만큼은 이런 생각이 든다. 내가 남긴 가장 소중한 것은 돈이나 건물이 아니라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나의 모습이라고. 내가 가르쳤던 제자들이 자신의 삶을 살아가다가 문득 나를 떠올리며 작은 미소를 지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내 삶에는 나름의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닐까.
물론 그것이 나의 모든 선택을 정당화해 주는 것은 아니다. 후회도 남고 아쉬움도 남는다. 다시 돌아간다면 다르게 살고 싶은 순간도 있다. 그러나 인생은 시험지처럼 틀린 답을 지우고 다시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주어진 시간 속에서 선택하고 그 선택의 결과를 안고 살아갈 뿐이다. 그래서 이제는 후회만 하며 남은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다. 지나온 삶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부족했던 점을 인정하고 아직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싶다. 무조건 오래 사는 것보다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도 잊지 않으려 한다.

산길은 여전히 길게 내 앞에 놓여있다. 다리에 쥐가 나는 증상은 점점 심해진다. 바위에 앉아 쉬다가 다시 일어서고, 몇 걸음 걷다가 또 멈춘다. 다른 날 같았으면 금방 내려왔을 길이었지만 오늘은 한 걸음 한 걸음이 하나의 작은 도전이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 인생도 산길과 닮았다고. 젊을 때는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더 높은 곳에 오르고 싶고, 더 많은 것을 이루고 싶다. 남보다 앞서고 싶고, 조금이라도 더 멀리 가고 싶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는 얼마나 멀리 가느냐보다 어떻게 돌아오느냐가 중요해진다. 무엇을 더 얻을 것인가보다 무엇을 소중히 간직할 것인가가 중요해진다.
내려오는 산길이라고 결코 실패의 길이 아니다. 오늘의 몸을 인정하고, 무사히 돌아갈 수 있는 길을 선택하는 것도 용기인 것이다. 젊은 날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을 비교하며 자책하기보다 달라진 몸으로도 여전히 걸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는 것이 어쩌면 나이 들어가는 법인지도 모르겠다.
오후 4시가 조금 지나 역에 도착했다. 열차에 몸을 싣자마자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나는 좌석에 기대어 깊은 잠에 빠졌다. 몸은 잠들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산길 어딘가를 걷고 있었던 것 같다. 꿈속에서도 지나온 삶이 떠올랐고, 눈가에는 다시 눈물이 고이는 듯했다. 그렇게 하루가 저물었다. 도쿄의 거리에는 사람들이 오가고, 세상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바쁘게 움직였을 것이다. 누군가는 돈을 벌고, 누군가는 새로운 꿈을 꾸고, 누군가는 내일을 준비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 평범한 일상속에서 나 역시 다시 학교로 돌아가고, 맡은 일을 하고, 사람들을 만나며 살아갈 것이다.

오늘 이후 내게 다카오산은 조금 다른 산이 될 것 같다. 단순히 땀을 흘리고 체력을 시험하는 산이 아니라 젊은 날의 나와 지금의 내가 만나는 곳이며, 잊고 살았던 기억과 아직 남아 있는 꿈이 마주하는 곳이 될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내려놓아야 할 것들과 끝까지 지키고 싶은 것들을 조용히 생각하게 하는 곳일 것이다. 나는 아직 살아 있다. 걸을 수 있고 생각할 수 있으며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아직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닌 것이다. 앞으로 얼마나 더 걸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예전처럼 한 달에 세 번씩 그 산을 오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언젠가는 정상까지 오르는 일조차 버거워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산에 오르는 방식이 달라진다고 해서 산을 사랑하는 마음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젊은 날처럼 빠르게 달릴 수 없다고 해서 삶의 가치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더 많은 것을 이루지 못했다고 해서 지금까지의 시간이 모두 헛된 것도 아니다. 이제는 조금 천천히 걸어도 좋다. 쉬어 가도 좋다. 뒤돌아보며 눈물을 흘려도 괜찮지 않을까. 중요한 것은 아직 내게 남아 있는 오늘을 함부로 보내지 않는 일이다.

한로가 지나고 가을이 깊어 간다. 나뭇잎은 물들고, 바람은 차가워지며, 산은 조금씩 겨울을 준비할 것이다. 자연은 때가 되면 자신이 가진 것을 내려놓는다. 어쩌면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 모른다. 움켜쥐고 있던 욕심을 내려놓고, 지나간 일에 대한 미련을 조금씩 놓아주며 곁에 있는 사람과 지금 이 순간을 소중히 여기는 것. 그것이 나이 들어가는 삶의 지혜일 것이다. 오늘 산길에서 내 눈물을 쏟아 내게 했던 노래가 다시 떠오른다. 세월아, 천천히 가자. 어쩌면 세월을 붙잡으려는 욕심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더 젊어지고 싶다는 투정만도 아니다. 아직 사랑하는 사람들이 곁에 있고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으며 아직 세상에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니 조금만 더 시간을 달라는 간절한 마음이다.
그러나 세월은 나를 기다려 주지 않을 것이니 세월이 천천히 가기를 바라기보다 마음을 조금 천천히 움직이도록 해야겠다. 앞만 보고 달리느라 놓쳤던 풍경을 바라보고 당연하게 여겼던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미처 하지 못했던 말들을 늦기 전에 건네야겠다. 그리고 내일도 가능하다면 다시 걸어야겠다. 예전처럼 멀리 가지 못해도 괜찮다. 정상에 오르지 못해도 괜찮다. 그저 내게 허락된 만큼 걷고, 힘들면 쉬고, 다시 일어나 한 걸음씩 나아가면 된다. 언젠가 마지막 산길에 서게 되는 날, 지나온 삶을 돌아보며 또다시 눈물이 흐를지도 모르겠다. 그때는 후회보다는 감사의 눈물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 더 많이 갖지 못한 아쉬움보다 이미 받은 사랑이 더 크게 느껴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 자신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참 많이 걸어왔구나. 잘한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구나. 이제는 조금 쉬어도 괜찮다.

오늘 다카오산의 가을길에서 흘린 눈물은 어쩌면 지나온 삶에 보내는 작별 인사인지도 모른다. 동시에 남은 삶을 조금 더 소중하게 살아 보겠다는 다짐인지도 모른다. 나는 아직 그 길 위에 있다. 세월은 여전히 흐르고, 가을은 깊어 가고, 내게 남은 시간도 조금씩 줄어들고 있다. 그래도 다시 신발 끈을 묶고 싶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과 내가 걸어온 길을 마음에 품고, 아직 내게 주어진 하루를 향해. 세월아, 네가 멈추지 못한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그러니 부디, 내가 남은 날들을 헛되이 보내지 않도록 내 마음만은 조금 천천히 가게 해 다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