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가장 많은 미술품이 모여 있는 곳은 박물관이 아니다.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도, 미국 뉴욕의 현대미술관(MoMA)도, 영국 런던 내셔널 갤러리도 아니다. 그 중심에는 스위스 제네바의 면세 보관시설인 제네바 프리포트가 있다.
프리포트는 원래 수입 물품이 통관되기 전 일시 보관하는 면세창고였다. 그러나 글로벌 자산가와 투자자들이 미술품을 투자 자산으로 활용하기 시작하면서 세계 최대 규모의 예술품 보관소로 변모했다.
제네바 프리포트에는 회화, 조각, 고고학 유물, 와인 등 다양한 고가 자산이 보관돼 있다. 외부에 공개되지 않는 특성상 정확한 규모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국제 미술시장에서는 수십만 점 이상의 예술품이 보관된 것으로 추정한다.
이곳이 주목받는 이유는 세금과 소유권 관리 구조 때문이다. 작품이 프리포트 내부에 머무는 동안에는 국가 간 수출입 절차가 발생하지 않아 부가가치세와 관세가 유예된다. 작품은 창고 안에서 소유주가 바뀌어도 실제 이동이 거의 필요 없다.
이 같은 구조는 미술품을 금융자산처럼 거래할 수 있게 만들었다. 세계 각국의 부호들은 프리포트 내 개인 전시실에서 작품을 감상하고 거래를 성사시키며, 작품은 창고 내 다른 구역으로 옮겨지는 것만으로 거래가 완료된다.
반면 투명성 부족 문제도 꾸준히 제기돼 왔다. 국제사회는 프리포트가 자금세탁과 탈세, 불법 문화재 거래에 악용될 수 있다는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실제로 2014년 스위스와 이탈리아 수사당국은 제네바 프리포트를 압수수색해 수천 점의 고대 로마·에트루리아 유물을 발견했다. 해당 유물들은 국제 문화재 밀거래 조직과 연관된 것으로 조사됐다.
이 과정에서 일부 유명 박물관들도 논란에 휘말렸다. 과거 프리포트를 통해 거래된 유물 가운데 불법 반출 사실이 확인되면서 여러 박물관이 소장품을 원산국에 반환해야 했다.
세계 미술시장의 상징적 작품으로 꼽히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품으로 알려진 Salvator Mundi 역시 한동안 프리포트에 보관됐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관심을 모았다.
전문가들은 프리포트가 세계 미술시장의 이면을 보여주는 공간이라고 평가한다. 공개 전시를 위해 탄생한 예술품들이 관람객 대신 투자자들의 금고 속에 잠들어 있는 현실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한때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여겨졌던 명작들이 이제는 국경을 초월한 자본의 저장고 안에서 거래되는 금융자산으로 변모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제네바 프리포트는 세계 미술시장의 번영과 그늘이 동시에 교차하는 현대 자본주의의 상징적 공간으로 남아 있다.
세금도 기록도 없는 미술품 지하세계…프리포트에 잠든 명작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