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당시 키 175센티미터에 몸무게 72킬로그램으로 제법 단단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어린 시절 내내 시골에서 농사일을 도왔고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는 핸드볼 선수로 뛰었던 덕분이었다. 요즘처럼 헬스장에서 만든 근육은 아니었지만 햇볕과 흙 그리고 땀으로 다져진 몸매였다. 그런 나를 홈스테이 집 아주머니는 유난히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곤 했다.
“유 해브 갓 갓-기븐 바디!”
처음 들었을 때는 무슨 말인지 몰랐다. 한참 뒤에야 ‘신이 내린 몸매’라는 뜻이라는 걸 알고 혼자 웃었다. 농사를 짓다 생긴 어깨와 허벅지가 영국 아주머니 눈에는 조각상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사람 인생 참 알 수 없다. 한국에서는 그저 ‘일 잘하게 생긴 몸’이었는데 영국에서는 ‘신의 작품’ 취급을 받았으니 말이다.
밤 12시가 넘어서야 우리는 홈스테이에 도착했다. 차창 밖으로 끝없이 펼쳐질 것 같던 영국의 모습은 생각보다 조용하고 작았다. 내가 상상했던 영국은 영화 속 궁전이었다. 드넓은 잔디밭과 고풍스러운 성, 벽난로가 있는 대리석 저택…. 그러나 실제로 내 앞에 나타난 것은 붉은 벽돌로 지어진 소박한 2층집이었다. 순간 약간의 실망감이 밀려왔다.
“어? 영국도 그냥 사람 사는 곳이네….”
1층에는 텔레비전 하나와 오래된 찬장이 마주 보고 있었고 그 사이에 소파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주방은 식당과 붙어 있었고 구형 컴퓨터 한 대가 들어간 작은 방은 마치 창고처럼 좁았다. 2층에는 부부 침실과 아이 방 그리고 손님용인지 창고용인지 모를 작은 방들이 있었다. 집 뒤에는 아담한 정원이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그 작은 공간이 참 정갈했다.
내가 배정받은 방은 더 단출했다. 싱글 침대 하나. 조립식 옷장 하나. 벽은 주인아주머니가 직접 페인트칠을 한 듯 울퉁불퉁했고 바닥 카펫에는 군데군데 담뱃불 자국이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갑자기 한국 집이 그리워졌다. 괜히 우리 집 장판 냄새가 떠오르고 엄마가 삶아주던 수건 냄새까지 생각이 났다. 게다가 집 안에는 낯선 서양인 특유의 체취가 배어 있었다. 지금이야 익숙하지만 그때는 정말 적응이 어려웠다. 머리는 피곤한데 코는 낯설고 몸은 눕고 싶은데 마음은 어색했다. 결국 나는 “영국 냄새도 공부다”라고 스스로 위로하며 침대에 몸을 던졌다.
다음 날 아침. 나는 또 한 번 문화 충격을 받았다. 식탁 위에는 우유 한 잔, 시리얼 한 접시 그리고 손바닥만 한 식빵 한 조각이 놓여 있었다. 끝이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건 식사라기보다 새 모이 아닌가….’ 하지만 첫 만남부터 실망한 표정을 지을 수는 없었다. 나는 최대한 환한 얼굴로 말했다.
“오우! 딜리셔스! 원더풀!”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뜨끈한 된장국과 김치 생각이 간절했다. 국물 없는 아침이 이렇게 허전한 것인지 그때 처음 알았다. 시리얼을 우적우적 씹으며 나는 한국 사람이 밥심으로 산다는 말을 뼈저리게 이해했다.

그날은 일요일이라 수업이 없었다. 나는 혼자 동네를 걸어보기로 했다. 영국 남쪽 끝의 작은 도시 보그너 레지스(Bognor Regis). 인구 1만 5천 명 정도의 조용한 바닷가 도시였다. 해변에는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이 나와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 누군가는 벤치에 누워 있었고 누군가는 모래사장에 엎드려 책을 읽었다. 신기한 건 아무도 남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것이 자유처럼 보였지만 또 한편으로는 무관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거리는 나의 평소 예상과 달랐다. 영화 속 런던처럼 화려하지 않았다. 집들은 대부분 작고 낮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집집마다 작은 정원이 너무나 예쁘게 꾸며져 있었다. 마치 성냥갑 같은 집 앞에 꽃들이 가지런히 피어 있었다. 사람들은 휴일이면 정원 손질을 하고 잔디를 깎고 이웃과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그 풍경을 보며 이상하고 생소한 감정을 느꼈다. 처음에는 실망했는데 오래 바라볼수록 따뜻했다. 대영제국의 위엄보다 사람 냄새가 먼저 보였기 때문이다. 동네 사람들과 짧은 영어로 대화도 나누었다. 말이 안 되면 손짓이 들어갔고 손짓이 안 되면 웃음으로 때웠다. 그들은 ‘코리아?’ 하고 되묻더니 한국보다는 오히려 ‘대우(DAEWOO)’를 더 잘 알고 있었다. 그 시절 대우자동차와 대우전자는 세계 곳곳으로 뻗어가던 때였다. 순간 나는 국가대표도 아닌데 괜히 애국자가 된 기분이었다.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영국인들의 자부심도 느낄 수 있었다. 웨일즈, 스코틀랜드, 잉글랜드, 아일랜드 이야기를 하며 서로 미묘하게 견제하고 거부하는 듯한 분위기도 흥미로웠다. 누군가는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조금 더 신사적이라고 귀띔해 주기도 했다. 무엇보다 재미있었던 건 그들의 반응이었다. ‘한국의 교사가 영국까지 유학을 온다고?’ 그들은 믿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시 한국은 영어 교육에 국가적 열정을 쏟고 있었다. 초등학교 영어 교육이 시작되면서 전국에서 교사들을 선발해 영국이나 미국으로 연수를 보내기고 했고, 나처럼 자비로 유학을 가기도 했다. 나는 영어를 전공하지 않았기에 내 영어 실력으로는 한국의 영어에 대한 집념과 엄청난 국가 프로젝트를 설명하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나는 서툰 영어로 말해주었다.
“코리아… 잉글리시… 베리 임포턴트… 거버먼트 머니… 티처…”
설명은 엉망이었지만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아마 절반은 이해했고 절반은 포기했을 것이다.
정원마다 피어 있던 꽃들도 인상적이었다. 특히 검붉은 양귀비가 눈에 띄었다. 한국에서는 흔히 볼 수 없던 꽃이었다. 처음에는 정원마다 양귀비가 피어 있는 모습에 깜짝 놀랐다. ‘영국은 이렇게 대놓고 키워도 되나?’ 호기심이 발동한 나는 어느 날 몰래 줄기를 하나 꺾어 입에 물어보기도 했다. 혹시 영화처럼 환각이 오는 건 아닐까 기대하면서. 결과는? 아무 일도 없었다.
그저 쓴맛만 입안에 오래 남았다. 나는 괜히 허세만 부린 국제 촌놈이었다. 지금 일본에서 살아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당시의 영국은 어딘가 일본과 닮아 있었다. 아니 일본이 영국과 닮았던가…. 집들이 생각보다 작고 집집마다 정원을 정성껏 가꾸며 자동차가 왼쪽으로 달리고 공공시설과 공원은 놀랄 만큼 잘 꾸며져 있다는 점까지. 아마 일본은 근대화를 하며 영국의 많은 것을 받아들였는지도 모른다. 유학 당시의 나는 영국을 보며 실망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 돌아보면 사실 내가 실망한 것은 영국이 아니라 ‘내 환상’이었던 것 같다. 제국은 화려한 궁전이 아니라 작은 정원을 가꾸는 사람들의 손끝에서 유지되고 있었고 선진국은 거대한 건물이 아니라 서로의 삶을 존중하는 태도 속에 숨어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작은 붉은 벽돌집에서 세상은 영화처럼 사는 곳이 아니라 사람답게 살아가는 곳이라는 것을 조금씩 배우고 있었다.
(영국 유학기-3에서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