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잔뜩 찌푸리던 하늘이 끝내 비를 풀어놓는다. 이런 날이면 이유도 없이 마음 한구석이 젖어 들고, 오래 잠가 두었던 기억의 문이 조용히 열린다. 그래서일까. 오늘 같은 날에는 문득,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고 싶어진다. 닿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끝내 보내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사람은 누구나 가슴 깊은 곳에 하나씩의 비밀의 방을 품고 살아간다. 쉽게 보여줄 수 없는, 함부로 열어 보일 수 없는 비밀의 방. 그리고 이상하게도 우리는 스스로 자기 방이 세상에서 가장 크고 깊다고 믿으며 살아간다. 나 또한 그렇다. 내 안에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 넓고도 큰 방이 하나 있다. 오래 전, 조심스레 키워 올렸던 첫사랑의 기억이 익어가던, 청포도 같은 방이다.
나는 어린 시절, 읍내까지 이십 리(8킬로미터) 길을 걸어서 학교에 다니던 시골 아이였다. 매일같이 이어지던 그 길 위에서, 내 마음은 늘 한 사람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오늘은 혹시 마주칠 수 있을까, 잠시라도 눈을 마주칠 수 있을까. 그 작은 기대 하나로도 가슴은 벅차올랐고, 발걸음은 가벼웠다. 멀리 보여도 그 아이의 모습은 유난히도 빛이 난다. 바라보고 있으면 세상이 환해지고, 그 아이가 있는 곳은 다른 세상처럼 느껴진다. 어린 나에게 그것은 분명, 청포도 같은 첫사랑의 감정이었다. 나는 그 아이를 더 가까이에서 보기 위해 늘 학교 생활을 같은 부서에서 했다. 지금도 같은 공간에서 숨을 나누던 순간들이 내 인생의 가장 환한 장면으로 남아 있다. 미술부에 들어가서 그림을 그리는 것도, 남보다 공부를 더 열심히 하는 것도, 몸을 단련하는 것도 모두 한 방향이었다. 오직 그 아이의 시선이 나를 향하기를 바라는, 서툴지만 간절한 몸부림이었다.

그때의 나는 그 아이를 위해서는 무엇이든 해낼 수 있었다. 내 삶의 중심이 그 아이였고, 그 마음은 서서히, 그러나 분명하게 익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인생은 늘 그렇게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는 법인지,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어느 날, 아무런 예고도 없이 그 아이는 내 곁을 떠났다. ‘나중에 대학에 들어가서 만나자’는 짧은 한마디만 남긴 채. 그날 내 마음은 무너져 내렸다. 세상이 갑자기 색을 잃었고, 모든 것이 낯설어졌다. 눈을 떠도 감아도 떠오르는 얼굴 하나에,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야 알게 되었다. 그 아이의 가족이 갑작스럽게 마을을 떠나야 했던 사정을. 하지만 이유를 안다고 해서 마음이 덜 아픈 것은 아니었다. 남겨진 자리의 공허함은 오히려 더 깊어졌다.
그 후의 시간은 나에게 쉽지 않았다. 그러나 나를 붙잡아 준 친구가 있었고, 그 덕분에 다시 걸어갈 용기를 조금씩 되찾았다. 그리고 한참의 세월이 지난 뒤에 나는 그 아이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하나로 낯선 도시로 유학을 결정했다. 그 선택은 무모했지만, 동시에 나를 지탱해 주는 유일한 이유이기도 했다. 낯선 곳에서의 외로운 밤들, 스스로를 책임져야 했던 고된 날들 속에서도 이상하게 나는 무너지지 않았다. 꿈속에서라도 그 아이가 나를 응원해 주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일까. 그렇게 버티며 지나온 시간들은 전쟁 같았지만, 동시에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시간이 한참 흐른 뒤. 아무런 준비도 없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나는 다시 그 아이를 만났다. 세상이 멈춘 듯한 순간이었다. 말로는 다 담을 수 없는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기쁨, 놀람,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슬픔까지. 우리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서 있었다. 눈물이 먼저 말을 대신했고, 시간은 그저 흘러갔다. 그러나 그 만남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너무 많은 세월이 지나 있었고,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기에는 우리는 이미 너무 조심스러워져 있었다. 결국 다시 각자의 길로 돌아섰고, 그 뒤로 우리의 이야기는 또 한 번 멈추고 말았다.
그리고 지금. 많은 시간이 더 흘러, 나는 또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가끔씩, 설명할 수 없는 빈자리가 느껴질 때가 있다. 아마도 그것은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있는 한 사람의 흔적일 것이다.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이면, 기억이 더 또렷해진다. 젖은 흙 냄새, 고향의 풍경, 그리고 그 시절의 나.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사라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조용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일까. 이런 날이면 문득 편지를 쓰고 싶어진다. 이름을 불러도 대답이 없을 것을 알면서도, 주소를 적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딘가에서 같은 비를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를 그 아이에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