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의 약속과 오늘의 현실]
훈민정음 해례본에는 ‘슬기로운 이는 하루아침에 깨치고,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이면 배울 수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한글이 쉽고 과학적인 문자임을 보여주는 말이다. 하지만 현재 학교 현장에서는 세종대왕의 말씀이 제대로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40여 년간 초등 교육 현장에서 관찰한 결과, 초등학교 4학년 학생들의 절반 이상이 한글 읽기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 결과 문해력 부족과 학습 격차가 점점 커지고 있는 것이다. 원인을 파악해보면 한글을 암기 중심으로 가르치고 있어서라는 생각이 든다.
[암기 방식 지도의 한계]
현재 교육현장의 국어 교육이 글자를 통째로 외우는 ‘통글자 학습’에 가까운 방식으로 진행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외국어 단어를 외우듯이 글자를 기억하게 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한글은 조합 원리가 분명한 문자이다. 모든 글자를 외우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론적으로 한글 음절 조합은 모두 합치면 1만자가 넘는다. 이를 암기로 해결하려 하면 아이들은 부담을 느끼고, 특히 겹받침과 같은 복잡한 구조에서 쉽게 좌절할 수 있다. 아이들은 규칙을 이해하지 못한 채, 문장을 읽을 때 글자를 정확히 소리 내지 못하고 문맥을 보고 뜻을 짐작하게 될 것이다. 결국 짐작하여 읽는 형식으로 흐르기 쉽다.
[소릿값과 발음]
한글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두 가지 개념을 구분해야 한다.
① 소릿값: 낱자(자음·모음)가 가지고 있는 기본 소리글자를 이루는 가장 작은 단위의 소리
② 발음: 낱자들이 결합해 하나의 글자(음절)가 되었을 때 나는 최종 소리
자음은 혼자서는 완전한 소리를 내지 못한다. 반드시 모음과 결합해야만 분명한 소리가 된다. 이것이 한글의 구조적 특징이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보통 자음을 ‘그, 느, 드’처럼 가르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자음의 원래 소릿값이 아니라 편의상 ‘ㅡ’를 붙여 만든 소리이다. 이렇게 배우면 아이들은 자음이 본래 어떤 역할을 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또한 첫소리 ‘ㅇ’을 소리가 없는 것으로 가르치기도 한다. 그러나 훈민정음 원리에서는 ‘ㅇ’ 역시 분명한 역할을 가진다. 이를 제대로 설명하지 않으면 읽기의 시작점이 흐려지는 것이다.

[ 읽기의 시작점이 사라진 교실 ]
요즘 교실에서 아이들이 책을 읽는 모습을 보면 이런 장면이 자주 보인다. 문장 앞부분은 또렷하게 읽는다. 뒤로 갈수록 말끝을 흐린다. 모르는 단어는 건너뛰거나 뜻을 짐작한다. 이는 집중력 부족 때문이 아니라 글자 하나하나를 소리와 정확히 연결하는 힘이 약하기 때문이다. 읽기에는 반드시 ‘시작점’이 필요하다. 글자를 보면 소릿값을 떠올리고, 그 소리를 이어 가며 읽어야 한다. 그런데 그 기준이 없으면 아이들은 문맥에 의존해 내용을 추측하게 된다. 이 상태가 계속되면, 받침을 외워야 할 목록으로 인식하게 되고, 겹받침을 두려워하게 되며, 문장의 조건과 관계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결국 이는 국어뿐 아니라 수학 등 다른 과목의 사고력에도 영향을 미친다.
[ 소릿값 중심의 원리 교육 ]
최근 국어 교육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문해력 위기의 해결 방법은 복잡하지 않다. 새로운 기술을 더하는 것이 아니라, 한글의 본래 원리를 회복하면 되는 것이다. 핵심은, 글자를 암기 대상으로 보지 않고, 낱자의 소릿값을 정확히 이해하게 하며, 읽기의 시작점을 분명히 세우고 규칙을 발견하도록 지도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겹받침도 외우는 것이 아니라, 규칙에 따라 스스로 판단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값’은 [갑]으로, ‘닮’은 [담]으로 읽힌다. 이를 단순 암기가 아니라 소리의 원리로 설명하면 아이들은 스스로 판단할 수 있다.
현재 잇슈가 되고 있는 문해력 위기는 아이들의 능력 부족 때문이 아니라, 한글을 원리대로 가르치지 않은 교육 방식의 문제인 것이다. 한글은 암기 과목이 아니므로 규칙을 가르치면 된다. 읽기의 시작점에 ‘소릿값’이라는 기준을 분명히 세워야 하는 것이다. 세종대왕이 설계한 ‘누구나 쉽게 배우는 글자’를 실현하려면, 암기 중심 교육에서 벗어나 원리 중심 한글 교육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