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일본 3대 출판사 중 하나인 KADOKAWA에서 출간된 『스고스기루 지리도감(すごすぎる地理の図鑑)』의 공저자로 참여했다. 이 책은 일본지리학회(日本地理学会) 가 공식 감수한 지리 입문 시리즈로, 전문성과 대중성을 함께 담은 교육용 콘텐츠다. 이번 KADOKAWA 창립 80주년 기념식에 내가 학회를 대표해 공저자 자격으로 그 자리에 서게 되었다.
솔직히 말해, 나는 전형적인 출판사 기념행사를 예상했다. 축사와 인사말, 그리고 회사의 역사를 되짚는 영상이 이어지는 정중하고 조용한 형식을 떠올렸다. 그러나 도쿄 국제포럼의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그 모든 예상은 완전히 무너졌다.
홀은 어둡고, 조명은 깊은 보랏빛으로 공간을 감쌌다. 회의장이라기보다 현대미술 공연장에 가까웠다. 일렉트로닉 사운드가 울려 퍼지고, 식이 시작되자 무대 한켠에 검은 망사스타킹에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성이 나왔다. 그녀는 사회자였다. 그런데 마이크 앞에 얌전히 서서 사회를 보는 대신 봉 위로 올라가 폴댄스를 추며 사회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순간 객석이 술렁였지만, 곧 모두가 숨을 죽였다. 그 움직임은 언어가 몸으로 옮겨가는 듯한 강렬한 상징이었다. 출판의 언어가 종이에서 벗어나 감각과 예술로 확장되고 있음을 그녀는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이후의 무대는 그야말로 파격의 연속이었다. 모래 위에 이야기를 그리는 SILT의 샌드아트, AI 피아니스트 야소야 카논(八十八カノン) 과 도쿄교향악단의 가상·현실 협연, 그리고 호주에서 온 SWAY Pole Company의 공중 퍼포먼스.
각기 다른 장르였지만, 모두가 같은 메시지를 전했다 —
출판은 이제 페이지를 넘어 공간과 경험의 예술로 진화하고 있다.
KADOKAWA 80주년 행사무대에는 회사가 지향하는 “출판 이후의 세계”를 무대로 구현했다. 후반부에는 프로 댄스팀 KADOKAWA DREAMS가 등장해 젊은 에너지로 무대를 가득 채웠고, 마지막에는 KADOKAWA 직원 합창단이 등장해 열정적인 합창으로 행사를 마무리했다. 그들의 얼굴에는 자부심과 감동이 동시에 담겨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놀라웠던 것은, 이 거대한 행사에 회장이 단 한 번도 무대에 오르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일반적인 기업 기념식이라면 회장이 직접 등장해 장시간 연설을 하는 것이 통상적이다. 하지만 KADOKAWA의 무대에는 그 흔한 연설조차 없었다. 오직 마지막 순간, 대형 스크린에 CEO 나쓰노 타케시(夏野剛) 의 짧은 감사 메시지가 흘러나왔다.
“80년의 여정을 함께해 주신 모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KADOKAWA는 앞으로도 세계의 재능과 감동을 잇는
크리에이티브 플랫폼으로 새로운 IP와 감동을 전해가겠습니다.”
단 몇 줄의 문장.
그것이 회사의 철학을 모두 설명하고 있었다. 그들은 ‘말’이 아닌 ‘무대’로 비전을 전했다. 이 연출은 KADOKAWA 그룹의 이념인 ‘不易流行(후에키류코)’, 즉 “변하지 않음 속에서 새로움을 추구한다”는 정신을 가장 정확히 체현한 순간이었다.
1945년, 전후의 폐허 속에서 角川源義(가도카와 겐요시)가 세운 ‘카도카와 쇼텐(角川書店)’은 오랫동안 문학과 교양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KADOKAWA는 출판을 중심으로 영화, 애니메이션, 게임, 교육, 디지털 기술을 융합한 종합 콘텐츠 기업으로 진화했다. 그들은 활자를 넘어, 이야기를 세계관으로 확장하고, 그 세계를 기술과 예술로 구현하고 있다.
이번 80주년 기념식은 그 철학을 가장 예술적으로 시각화한 장이었다. KADOKAWA는 이날, 출판의 틀을 부수고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그리고 나는 그 현장에서, 일본 콘텐츠 산업의 무궁한 가능성과 저력을 다시 보았다. 변하지 않음 속에서 끊임없이 새로움을 만들어내는 후에키류코(不易流行) ―
그 정신이야말로, 일본이 세계 콘텐츠의 중심으로 다시 도약할 수 있는 힘이라는 것을.
송원서 (Ph.D.)
슈메이대학교 전임강사 / NKNGO Forum 대표
https://geographersong.jp/abou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