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1년 여름, 러시아 연해주의 작은 도시 자유시(Свободный)에서 한인 독립군이 서로에게 총구를 겨누는 참극이 벌어졌다. 훗날 ‘자유시사변’이라 불린 이 사건은 외세의 정치 계산과 사상 갈등 속에서 빚어진 민족 내부 무력충돌이었다.
1920년 봉오동·청산리 전투 이후 일본군의 보복인 ‘간도참변’이 이어지자 많은 무장독립군 부대가 만주를 떠나 러시아 연해주로 향했다. 당시 자유시는 소비에트 정권의 통제 아래 있었고, 교통 요지로서 병력 집결에 유리했다. 독립군은 ‘대한독립군단’으로 재편되며 홍범도, 이청천 등 주요 지휘관들이 합류했다.
그러나 일부는 소비에트 적군과 연대해 사회주의 혁명과 독립을 함께 추진하자는 입장이었고, 다른 일부는 민족주의 중심의 무장 독립노선을 고수했다. 볼셰비키 극동정권은 일본과의 마찰을 피하려 한 나머지 한인 부대의 무장해제를 요구했다.
1921년 6월 말, 무장해제 명령을 거부한 독립군 부대가 자유시를 이탈하려 하자 적군과 한인 공산계 부대가 이를 무력으로 막았다. 총격전이 벌어져 수백 명이 전사하거나 부상당했고, 일부는 시베리아 내륙이나 만주로 흩어졌다.
자유시사변은 연해주 지역 한인 무장세력을 사실상 와해시켰다.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세력 간 불신은 깊어졌고, 이후 만주와 중국 본토의 독립운동에도 그 여파가 이어졌다. 역사는 이를 ‘한인 무장독립운동 최대의 비극’으로 기록한다. 오늘날 자유시사변은 외세 개입과 내부 분열이 맞물릴 때 어떤 비극이 초래되는지를 보여주는 경고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