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영 칼럼 25>외국어 표기법에 관한 단상 –

대치엉 역을 아시나요?

– 외국어 표기법에 관한 단상 –

우리나라의 대중교통은 세계 최고의 시설과 운영 시스템으로 정평이 나 있다. 버스의 경우 친절한 안내 방송은 다음 정차역까지 알려주니 초행길에도 많은 도움이 된다. 그런데, 내가 즐겨 타는 마을버스에서 “This is [대치엉] station”이라고 하는 안내 방송이 나올 때마다 뜨아하면서도 신통방통하다. [대치엉 역]은 실제로 어느 역을 의미할까요? 대치동에 있는 3호선 [대치역]일까요?

아마도 버스 안내 방송에 참여한 원어민(방송에 참여하는 원어민은 대개 Native Speaker 혹은 약칭으로 NS라고 함)은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방송이 우리말과 영어로 제공되니 당연히 영어식으로 대본을 읽었음에 틀림없으리라 짐작된다. 아마도 안내 방송 대본은 ‘This is Daecheong station.’일 것이다. 여기에서 <Daecheong station>은 우리말로 어느 역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대치역>일까요? <대청역>일까요?

정답을 말하기에는 대단히 흥미로운 언어학적인 비밀을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나라의 외래어 표기법에 관한 얘기다.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외국어의 발음을 한국어로 표기할 때, 그 발음을 로마자로 표기한 후 한국어 음가에 맞게 변환한다고 되어 있다. 즉 [Daecheong station]에서 우리말[어]을 로마자 표기법상 [eo]로 표기한 것이다. 그러나 영어에서의 [eo]는 우리말로 [어]가 아니라는 게 문제다. NS는 [이]+[어]로 발음하였기에 [대치엉 역]이라는 괴물 단어를 탄생시킨 것이다. 아마도 [대치엉 역]을 [대치역]으로 잘못 듣고 화들짝 놀라 내릴 외국인도 없지 않았으리라.

NS는 [대청역]을 [대치엉 역] 이라고 잘못 발음을 한 것인데, 대청역의 <대청>을 <Daecheong>이라고 적은 것은 로마자 표기법에 따른 것이다. [대치엉]이 아닌 [대청]이라고 영어로 읽히길 원한다면 영어식 표기는 <Daechung>이라고 해야 한다. 즉 이러한 발음의 혼란이 야기된 데에는 여러 사람의 문제의식 결여에서 비롯된다. 정거장 이름을 외국어로 적어 준 사람도 NS도 모두가 한국어의 외국어 표기는 로마자 표기법에 따른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정거장 이름을 외국인에게 적어도 한 번쯤은 우리말 발음을 알려주었어야 한다. 영어를 사용하는 원어민이 우리의 역명을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야 진정한 프로요 직업인이다. 그러나 이마저도 미처 몰랐다면 자신이 넘겨준 영어 대본의 전체 구간을 한 번쯤은 버스든 지하철이든 이용을 해보아야 한다. 피드백이라는 단어가 그냥 있는 게 아니다.

그렇다면 왜 하필 외국어를 우리말로 표기할 때 국제 통용어인 영어가 아닌 로마자로 표기를 해야 할까? 우선은 현실적으로 외국어 중에 우리의 생활 속에 자리 잡은 외래어 중에는 영어뿐만 아니라 많은 외국어가 있다. 영어로 표기해서는 의미 전달이 안 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는 뜻이다. 파리, 카페, 르네상스, 예수 등이 영어가 아닌 좋은 예다. 특히 고유명사의 경우 해당 언어의 특징을 존중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외국어를 영어로만 표기하면 안 된다.

그러면 영어가 아닌 것은 좋은데, 왜 사어(死語)로 알려진 로마자일까? 하는 의구심이 생긴다. 로마자와 라틴어의 관계는 한글과 한국어의 관계와 같다. 즉 로마 전성기 시절 로마 무한 팽창하여 로마의 점령지 중 많은 지역이 로마의 언어인 라틴어를 사용하게 되었고, 이 라틴어의 글자가 로마자인 것이다. 세계를 호령하던 로마의 패망과 함께 라틴어도 공식 언어의 기능을 상실하며 로마자가 사어가 되었는데, 사어가 사어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엄청나게 중요한 역할을 하는 언어가 있다. 바로 히브리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최초의 성경은 히브리어로 씌어졌다고 한다. 그런데, 로마자와 마찬가지로 히브리어도 사어(死語)가 되었다.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왜 사라졌을까? 하는 의구심이 또 들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성경학자들은 히브리어가 사어가 되지 않았다면, 영어와 한글에서 보아 알듯이 고어와 현대어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만일 히브리어가 사어가 아닌 살아있는 언어라면, 히브리어도 엄청난 변천을 겪게 되어 하나님의 말씀 또한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 혹은 변질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즉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기 때문에 변해서는 안 되는 절대적 말씀이다. 따라서 성경에 기록된 히브리어 또한 변할 수 없는 절대어가 되었다고 한다.

사즉생(死卽生)이라는 말이 이렇듯 언어에도 적용된다는 사실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로마자와 히브리어가 사어(死語)가 되었기에 오늘날에도 절대 규범 혹은 진리의 말씀으로 살아 있는 것처럼 우리네 인생도 너무 고개 뻣뻣하게 들고 다니지 말고 한 번쯤은 고개를 숙여주는 아량과 베풂이 있는 삶이었으면 좋겠다.

주. 위 기사와 대치역 이미지와는 실질적 관계가 없음을 밝힙니다.

댓글 남기기

EduKorea News에서 더 알아보기

지금 구독하여 계속 읽고 전체 아카이브에 액세스하세요.

계속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