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 갠 오쿠보 거리에 울려 퍼진 화합의 선율
- 정치가 풀지 못한 마음의 거리를 문화로 좁히다
- 오쿠보에서 피어난 한일 우호의 가능성
- 오쿠보, 낯선 이웃에서 함께 살아가는 이웃으로
- 정치가 넘지 못한 벽, 민간 교류가 길을 열다
- 한류의 다음 단계, 소비를 넘어 이해로
- 축제의 선율이 미래의 다리가 되기를
2026년 10월 12일, 30여 일 넘게 이어지던 비로 인한 이상 기온속에 모처럼 화창한 가을 하늘이 모습을 드러냈다. 기다렸다는 듯 활기를 되찾은 도쿄 신주쿠의 오쿠보 거리에서는 제43회 오쿠보 마쓰리(축제)가 열렸다. 재즈의 선율과 힘찬 퍼레이드, 다채로운 거리 공연이 어우러진 축제의 현장은 사람들의 웃음과 박수로 가득 찼다. 그곳에는 단순한 지역 축제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오랜 역사와 복잡한 감정으로 때로는 멀어졌던 한국과 일본이 서로를 이해하고, 함께 미래를 만들어 갈 수 있다는 희망이 거리 곳곳에서 피어났다.

오쿠보 마쓰리는 일본 ‘오쿠보상점가진흥연합’이 주최하고 한국 측에서는 신주쿠한인상인연합회(회장 신대영)과 재일본대한민국민단도쿄신주쿠지부(지부장 조명)가 협력해 온 지역 축제이다. 그리고 신주쿠구청과 신주쿠관광협회, 신주쿠일한친선협회 등에서 적극 후원하고 있다. 특히 오쿠보 도리를 이 날은 자동차 없는 거리로 운영할 수 있도록 행정과 지역사회가 협력했다는 점은 이 축제가 한인 사회만의 행사가 아니라 지역 주민과 상인, 관광객이 함께 만들어 가는 공동체의 축제임을 보여준다.

(행사에 참여하는 도쿄 신주쿠 구청장 – 앞 열 오른쪽 흰셔츠)
30여 년 전만 해도 오늘날과 같은 한국 문화의 중심지로 알려지지 않았던 오쿠보 거리는 한국인들이 모여들고 상권을 형성하면서 새로운 변화를 맞이했다. 이제 이곳은 한국 음식과 화장품, 음악과 패션, 다양한 한국 문화를 경험하려는 일본인과 세계 각국의 관광객이 찾는 명소로 자리 잡았다. 오쿠보의 변화는 단순히 상점의 간판이 바뀌고 거리가 번화해진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일상에서 만나고, 음식을 나누며, 음악을 즐기고, 상대방의 생활 방식을 자연스럽게 알아 가는 과정이 축적된 결과다.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한국 음식을 맛보던 사람들이 한국 드라마를 시청하고, K-팝을 즐기며, 한국어를 배우고, 직접 한국을 방문하기도 한다. 문화에 대한 관심이 사람에 대한 호감으로 이어지고, 그 호감이 다시 교류와 이해를 넓히는 선순환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오쿠보는 바로 이러한 변화가 살아 움직이는 현장이다. 한인 상인들이 일구어 온 삶의 터전이 일본 지역사회와 세계를 연결하는 문화의 공간으로 성장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는 더욱 크다.

(정애진 한국 무용 연구소 단원들의 거리 공연)
한국과 일본은 지리적으로 가까운 이웃이지만, 마음의 거리가 언제나 가까웠던 것은 아니다. 식민지 지배의 역사와 역사 교과서 문제, 영토 문제 등 양국이 풀어야 할 과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정권의 성격과 정치적 상황에 따라 관계가 개선되기도 하고 다시 경색되기도 했다. 그러나 한일 관계의 미래를 정치적 갈등에만 맡겨 둘 수는 없다. 정부 간 외교가 해결해야 할 문제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와 동시에 시민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신뢰를 쌓아 가는 노력도 지속되어야 한다. 정치가 국가 간의 관계를 조정한다면 민간 교류는 그 관계를 지탱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연결한다.
오쿠보 마쓰리의 가치는 바로 여기에 있다. 한국과 일본의 사람들이 같은 거리에서 음악을 듣고 공연에 박수를 보내며 서로의 문화를 즐기는 순간만큼은 국적과 역사적 배경의 차이가 대화와 만남의 출발점이 된다. 물론 축제 한 번으로 오랜 역사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상대방을 직접 만나고 이해하려는 경험이 쌓이지 않는다면 진정한 화해와 협력도 기대하기 어렵다. 한일 우호는 거창한 선언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서로의 문화를 존중하는 상인 한 사람, 이웃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는 주민 한 사람, 상대국의 음악과 언어를 배우는 청년 한 사람의 작은 실천에서 시작된다. 이러한 만남이 쌓일 때 민간 교류는 외교가 흔들리는 순간에도 양국 관계를 지탱하는 든든한 기반이 될 수 있다.

(이창섭 사물놀이 단원들의 거리 공연 – 흰 옷 꽹과리가 이창섭)
일본에서 한국 문화의 인기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드라마 ‘겨울연가’가 한류의 문을 연 이후 한국 드라마와 영화, K-팝은 일본 사회에 깊숙이 자리 잡았다. 이제는 음악과 영상 콘텐츠를 즐기는 데서 나아가 한국의 음식과 화장품, 패션, 언어와 일상 문화를 직접 경험하려는 관심으로 확장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젊은 세대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한국 문화를 특별한 외국 문화가 아니라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접하는 문화로 받아들이는 청년들이 늘어나고 있다. 온라인 콘텐츠를 통해 서로의 생활을 살펴보고 여행을 통해 직접 만나며 상대방의 언어로 소통하려는 움직임도 이어지고 있다. 최근 일본의 젊은 여성들은 일본인 외의 결혼 상대로 한국인 남성을 제1로 꼽는다고까지 한다.
이제 중요한 것은 한류의 인기를 일시적인 유행이나 소비에 머물게 하지 않는 일이다. 한국의 음악을 좋아하는 일본 청년이 한국의 역사와 사회를 이해하고, 일본 문화를 즐기는 한국 청년이 일본 사회의 다양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 문화 교류는 비로소 상호 이해로 발전한다. 젊은 세대의 교류는 특히 중요하다. 오늘의 청년들이 서로를 이해하는 이웃으로 성장한다면, 내일의 한일 관계는 지금보다 훨씬 안정적이고 미래지향적인 모습으로 발전할 수 있다. 학교와 대학의 교류, 청소년 공동 활동, 언어교육, 문화예술 협력 등 만남의 기회를 더욱 넓혀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작년 세계 1위 도시였던 도쿄를 제치고 금년에는 서울이 차지한 것은 고무할만한 일이다.
이날 오쿠보 거리에 울려 퍼진 재즈와 힘찬 퍼레이드, 활기찬 거리 공연은 축제 참가자들에게 즐거운 추억을 선사했다. 그러나 그 의미는 축제가 끝난 뒤에도 이어져야 한다. 거리에서 나눈 웃음이 서로에 대한 관심으로, 관심이 이해로, 이해가 지속적인 협력으로 발전할 때 축제는 진정한 결실을 맺는다. 이를 위해서는 한인 상인과 일본 지역사회의 협력을 더욱 강화하고, 지방자치단체와 민간단체가 함께 참여하는 교류 사업을 지속적으로 확대할 필요가 있다. 청소년과 청년들이 함께하는 문화예술 활동과 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양국 주민들이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는 기회도 늘려야 한다. 한류의 성과를 경제적 이익에만 한정하지 않고 상호 이해와 공동체 발전으로 연결하는 노력 역시 중요하다.

(신주쿠한국상인연합회 주관 조선통신사 행열 – 동경한국학교 고등부 학생들의 봉사활동)
오쿠보 거리가 오늘날의 모습으로 성장하기까지는 이곳에서 삶을 일구어 온 한인 상인들의 노력과 일본 지역사회의 협력이 있었다. 그 과정은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사회를 만드는 일이 결코 쉽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동시에, 꾸준한 만남과 협력이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가능성도 증명한다.
한국과 일본은 동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협력해야 할 중요한 이웃이다. 역사적 문제를 외면해서도 안 되지만, 그 문제를 이유로 미래 세대의 만남과 교류까지 멈추게 해서도 안 된다. 과거를 올바르게 기억하면서 현재의 신뢰를 쌓고, 미래의 공동 과제를 함께 해결하려는 지혜가 필요하다.

(대한민국민단도쿄신주쿠지부(부인회)의 출점, 오른쪽은 신주쿠한국상인연합회 신대영 회장)
화창한 가을 하늘 아래 열린 제43회 오쿠보 마쓰리는 하루의 축제로 끝나지 않는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미소와 음악의 울림, 서로의 문화를 향한 박수는 한일 양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조용히 일러 주었다. 가까운 나라가 되는 것은 지리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다. 서로를 경계의 대상이 아닌 이해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차이를 갈등의 이유가 아닌 배움의 기회로 받아들일 때 한국과 일본은 비로소 진정한 이웃이 될 수 있다. 오쿠보 거리에서 시작된 작은 만남들이 더 많은 만남으로 이어지고, 오늘의 축제가 내일의 신뢰를 키우는 씨앗이 되기를 바란다. 비가 그친 가을날 오쿠보를 가득 채운 음악과 웃음이 한국과 일본을 잇는 따뜻한 다리로 오래도록 남기를 기대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