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햇살이 스며드는가 싶더니 이내 하늘이 잿빛으로 내려앉습니다. 비에도 성격이 있는 걸까요. 20여 년 만에 찾은 고국의 하늘은 유난히 변덕을 부립니다. 퍼붓다가 금세 걷히고 또다시 쏟아내기를 며칠째입니다. 잠깐 그친 틈을 타 뒷산으로 버섯을 찾아 나선 나는 천둥의 포성에 떠밀려 허겁지겁 집으로 다시 쫒겨옵니다. 소란이 가신 뒤 고요를 뚫고 울려 퍼진 건 매미의 울음 소리입니다. 여덟 해를 땅속에서 견디다 단 일주일 남짓 세상을 누리는 존재 그 절박한 울음은 생의 마지막을 향한 치열한 배움의 시간처럼 들립니다. 그 소리를 들으며 비가 곧 ‘모험’이던 유년의 여름이 떠오릅니다.
그때의 비는 자연이 열어 주는 배움의 교실이었습니다. 어른들이 잠시 농사일을 멈추면 아이들의 자연과의 수업이 시작됩니다. 검정 고무신 앞코를 구부려 만든 ‘고무신 불도저’로 흙을 밀어 물길을 막아 댐을 만들어 물길의 흐름을 배우고, 호박잎 대롱을 꽂아 만든 물레방아를 돌리며 힘의 원리를 익힙니다. 물살이 빨라지면 서로의 물레방아가 더 빨리 돌기를 응원하며 승부를 걸었고, 내기에 지게 되면 영락없이 개미 똥구멍을 핥아야 했습니다. 병정개미의 산이 혀에 닿을 때의 몸부림은 지금 생각하면 ‘질서’와 ‘협동’, ‘책임’이었고, 가끔은 개미집인 줄 알고 건드린 곳이 땅벌집이어서 얼굴이 우주인처럼 부어오르던 해프닝은 자연이 건네는 경고장이었습니다. 갈대 잎을 접어 만든 작은 배가 도랑 모퉁이에서 뒤집힐까 마음 졸이며 끝까지 달리던 순간 우리는 인내와 실패를 배웠습니다. 누구도 ‘오늘의 학습 목표’를 설명해 주지 않았지만 자연은 이미 충분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비 온 날의 마을은 아이들에게 그 자체로 커다란 놀이동산이자 배움터였습니다.
비가 그친 산길은 특별히 선명합니다. 멀게만 보이던 앞산이 손에 잡힐 듯 가까워지면 발걸음은 산으로 향합니다. 빗물에 씻겨 반짝이는 풀잎과 나무 사이로 고개를 내미는 버섯을 찾는 재미는 체험자 만이 느낄 수 있는 즐거움입니다. 화려한 버섯일수록 독을 품고 있고 볼품없이 고개만 내민 다소곳한 녀석들이 맛있고 몸에 좋은 버섯입니다. 겉모습이 전부가 아니라는 단순한 진실, 교과서보다 자연이 먼저 알려주는 교훈입니다. 사람 사는 이치가 크게 다르지 않음을 산과 버섯과 자연은 조용히 일러줍니다. 운이 좋으면 더덕이나 도라지 향이 흩날리는 보너스도 얻지만 산행엔 늘 복병 또한 있습니다. 억새풀에 베여 따끔거릴 때는 약도 없이 침 한 번 바르고 견뎌야 했고, 도랑에서 미꾸라지를 몰다가 깨진 농약병이라도 밟으면 피를 보기도 합니다. 그 위험마저도 조심과 책임을 배우게 되는 자연의 값진 가르침입니다. 자연은 삶의 지혜를 스스로 체득하게 해 줍니다.
빗물이 불어난 개울에서 지렁이 한 마리를 꿰면 연이어 올라오는 붕어는 ‘기회’와 ‘때’가 언제인지를 경험으로 알게 해 줍니다. 미꾸라지를 몰며 옷이 젖는 것도 잊었던 몰입의 시간은 오늘날 말하는 ‘집중력 교육’보다 훨씬 생생합니다. 자연은 놀이를 통해 배우게 하고 몸으로 익힌 깨달음은 오래 남습니다. 돌아보면, 우리가 자연 속에서 배운 것들은 시험 점수와는 거리가 멉니다. 그러나 때(타이밍)을 읽는 감각, 위험을 예측하는 지혜, 더불어 살아가는 법 그리고 실패를 받아들이는 마음 등 삶을 지탱하는 힘은 대부분 자연이 가르쳐 주고 자연에서 우리는 배우게 됩니다.
오늘 우리의 교육은 아이들을 자연으로 보낼 준비가 되어 있는가요. 책과 화면 앞에만 머물게 하면서 우리는 가장 위대한 스승을 교실 밖에 세워두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자연과 어울려 살아보는 경험이야말로 교육의 본질입니다. 자연 앞에서 아이는 스스로 질문하고, 직접 부딪치며 답을 찾아갑니다. 그것이 사고력을 키우고 감성을 단단히 합니다. 자연이 스승일 때, 지식은 비로소 삶이 됩니다.
창밖의 빗소리를 듣습니다. 변덕스러워 보이던 비는 이제 리듬처럼 들립니다. 20년 만에 다시 만난 고국의 이 빗줄기는 잊고 지냈던 깨달음을 조용히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교육은 자연을 만나는 일에서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자연이 우리에게 늘 그렇듯 말없이 가르쳐 줄 때까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