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필·오히라 메모’는 무엇인가?

김종필,박정희의 처남 박상희의 장녀 박영옥과 결혼, 박정희대통령의 조카사위이자 처삼촌

1962년 11월, 한국과 일본의 국교 정상화를 위한 협상의 분수령이 된 이른바 ‘김종필·오히라 메모’는 한 장의 메모지에 적힌 금액과 조건으로 만들어진 비공식 문서다.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5·16 군사정변 이후 중단과 재개를 반복해온 한일회담을 서둘러 정상화하려 했다. 경제개발에 필요한 자금을 일본으로부터 받아내기 위해서였다.

박 의장은 1961년 11월 미국 방문길에 일본에 들러 이케다 총리와 조속한 국교정상화에 합의했다. 그러나 이후 실무협상은 진전되지 않았고, 결국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을 특사로 보내 일본과 본격 협상에 나서게 했다. 1962년 10월 20일, 김종필은 도쿄에서 오히라 외무장관을 만나 1차 협상을 벌였으나 성과 없이 귀국했다.

미국 체류 중 박정희의 긴급 지시를 받은 김종필은 다시 일본으로 향했다. 박 의장은 반드시 ‘청구권’이라는 표현을 명기하고, 총 6억 달러 이상의 금액을 받아내야 한다고 지시했다. 또한 독도 문제는 협상 의제가 될 수 없다는 점도 분명히 하도록 했다.

김종필은 오히라와의 회담 자리에서 서로 양보 가능한 최종 금액을 종이에 적어 교환하자고 제안했다. 이에 오히라도 동의했고, 일본 외무성 메모지를 찢어 양측이 최종금액과 조건을 연필로 적어 맞바꿨다. 이 장면이 바로 ‘김종필·오히라 메모’로 불리는 역사적 순간이다. 이 메모를 바탕으로 3시간 반 만에 협상 초안이 마련됐다.

그러나 박정희는 메모에서 ‘청구권’ 표현이 빠진 것을 확인하고 격노했다. 이로 인해 이후에도 한국은 이를 ‘청구권 자금’, 일본은 ‘경제협력 자금’ 또는 ‘독립 축하금’이라고 해석하는 시각차가 생겼다.

이 메모는 2년간 비밀에 부쳐졌다가 1964년 3월, 김종필이 다시 오히라를 만나 조약 체결 일정에 합의한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공개로 전환됐다. 학생들의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고, 정부는 3월 31일 학생 대표들과의 면담에서 메모 내용을 설명했다.

이때 정부는 “한국은 청구권으로 3억5000만 달러, 일본은 2억5000만 달러를 제시했고, 차관은 한국 2억5000만 달러, 일본 2억 달러, 민간 차관은 양국 모두 1억 달러 이상이었다”고 밝혔다. 이후 2005년 외교문서 공개를 통해 무상 3억, 유상 2억, 민간차관 1억 달러 등 총 6억 달러라는 최종 합의 내용이 확인됐다.

1964년 이 비공식 메모가 외교 관례를 깨고 공개되자 일본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며 “구속력 없는 문서”라고 해명했다. 우리 정부는 문서 자체가 아닌 내용만 공개한 것이라며 사태를 수습했다.

김종필·오히라 메모를 바탕으로 한 협상은 1965년 6월 22일 한일조약 체결로 마무리됐다. 14년 1개월 28일간 이어진 한일회담의 끝이자, 을사조약 이후 61년 만의 국교 정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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