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때로 아주 작은 사건 하나로 송두리째 흔들리곤 한다. 거창한 실패나 거대한 시련이 아니라,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쳐 버린 순간, 소홀히 여겼던 사소한 것 하나가 인생을 바꾸어 놓기도 한다. 나도 그런 경험이 있었다. 일본에 오게 되고 5년이 지난 어느 아침이었다. 출근 준비를 서두르던 내 발밑에 무언가 툭 떨어졌다. 자세히 보니 외국인등록증이었다. 무심코 책꽂이에 꽂아두고 잊고 있었는데 그날 아침에야 마주한 것이다. 보는 순간 너무 놀랐다. 유효기간이 지나 버린 것이다. 순간 온몸이 얼어붙는 듯했고 “불법체류”라는 낯선 단어가 눈앞에 떠올랐다. 급히 출입국관리국에 전화를 걸었다. 돌아온 답은 단호했다. “즉시 오라.” 그 한마디가 마치 판결문처럼 들렸다. 납덩이처럼 무거운 발걸음으로 [시나가와]에 있는 [입국관리국] 의 6층 조사실 문을 열었을 때, 나는 그곳이 더 이상 행정기관의 창구가 아니라 긴장과 두려움이 뒤엉킨 작은 법정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줄지어 서 있는 외국인들의 굳은 표정, 울음을 터뜨리는 이들의 떨린 목소리, 심문관의 매서운 말투…. 영화 속 취조실의 한 장면에 들어온 듯했다.

그날 나는 첫 번째 심사를 받았다. 하루 종일 기다린 끝에 겨우 한 시간 남짓 주어진 기회였다. 그러나 결과는 냉정했다. “불법체류 판정” 아무리 상황을 설명해도 소용이 없었다. 소명자료를 보완해 2주 뒤 다시 오라는 통보를 받았다. 두 번째, 세 번째 심사에서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결국 지문을 찍고, 번호판을 목에 걸고, 사진을 찍으며 스스로 죄수의 신분이 된 듯한 모멸감을 느껴야 했다. 내가 먼저 신고했는데도, 단 하루 늦었을 뿐인데도, 그 하루는 이렇게 무겁게 다가왔다. 억울함과 두려움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매달리는 것뿐이었다. 마지막 순간, 한 직원이 법무대신 앞으로 탄원서를 써 보라는 조언을 건넸다. 그것은 마지막 빛줄기였다. 나는 대한민국 공무원임을 밝히며 반드시 일본에 머물러야 하는 사정을 간절히 호소했다. 떨리는 손으로 써 내려간 글씨마다 간절한 마음을 실었다. 그리고 기적처럼, 단 10분 만에 [특별체류허가 1년]이라는 도장이 찍혔다. 긴 기다림 끝에 찍힌 도장 하나. 그 붉은 잉크가 내 여권에 번져가는 순간, 그동안의 불안과 긴장이 한꺼번에 녹아내렸다. 안도의 숨이 새어나왔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오래도록 떨림이 남아 있었다.

그날 이후 내 삶은 달라졌다. 남들은 보통 3년짜리 비자를 받지만 나는 여전히 몇 년째 계속 1년짜리 체류허가만을 받는다. 비자 연장을 위해 이틀을 허비하고, 비용을 치르며, 다시 심사를 받는다. 불편하고 힘들지만, 나는 이제 그 불평을 쉽게 내뱉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하루가 내게 가르쳐준 것이 너무도 크기 때문이다. 작은 부주의가 얼마나 큰 파장을 일으킬 수 있는지, 나는 뼈저리게 배웠다. 달력 속 비자 만기일에는 굵은 동그라미가 새겨지고, 마음속에는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경계심이 늘 자리 잡았다.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다짐은 생활의 습관이 되었고, 삶을 대하는 태도마저 바꾸어 놓았다.

돌이켜보면, 그 하루는 나를 두렵게 했다. 그러나 동시에 내 삶을 단단하게 다져 준 스승이기도 하다. 우리는 흔히 하루를 하찮게 여기지만, 그 하루가 때로는 인생 전체의 무게를 바꾸는 결정적 순간이 될 수도 있다. 나는 지금도 마음속으로 다짐한다. 하루를 가볍게 넘기지 말자. 그 하루를 성실하게 지켜내자. 왜냐하면 하루의 무게는 결코 하루에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