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습관적으로 성당엘 간다. 교직에 몸담으면서 ‘몸에 베여 습관화되도록 반복적으로 생활지도 해 주세요.’라던 교감 선생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몸에 베여 습관적으로 지켜지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일요일 아침 눈이 떠지면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성당을 가고 있으니…. 성당을 다니며 요한 23세 교황님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내 마음은 한없이 고요해진다. 어느 날, 교황님이 보이지 않아 비서 신부가 교황청 안을 분주히 찾았다고 한다. 집무실도, 응접실도, 복도도 모두 비어 있었다. 세상의 크고 작은 문제를 품에 안고 사는 분이기에, 사람들은 늘 교황님이 무언가 중요한 일을 하고 계실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마침내 작은 기도실 문을 열었을 때, 그곳에 교황님이 조용히 앉아 계셨다. 아무 말씀도 없이, 그저 고요히. “그렇게 오랜 시간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까?” 비서의 물음에 교황님은 짧게 답하셨다. “그냥 앉아서 말했지. ‘당신은 여기 계시고, 저도 여기 있습니다.’” “다른 기도는 안 하셨습니까?” “다른 말은 한 마디도 안 했네.” 그 대답은 너무도 단순했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깊었다. 우리는 기도할 때 무엇인가를 자꾸 말하려 한다. 청하고, 설명하고, 설득하려 한다. 그러나 교황님은 이미 가장 중요한 기도를 드리고 계셨던 것이다. ‘당신은 여기 계시고, 저도 여기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의 본질이다. 하느님이 계시다는 믿음, 그리고 그분 앞에 내가 서 있다는 자각. 그 두 가지가 만나는 순간, 기도는 이미 완성된 것이 아닐까.

베네딕토 16세 교황님도 이런 말씀을 하셨다. 성 아우구스티노의 말을 인용하며, 하느님께서는 늘 우리와 함께 계시지만 우리는 늘 그분과 함께 있지 않는다고. 기도는 바로 우리의 존재를 열어 그분의 현존을 받아들이는 시간이라고 말이다. 하느님은 멀리 계시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멀리 서 있을 뿐이다. 예수님께서는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하셨다. 그분을 따른다는 것은 단지 입으로 “주님”이라 부르는 일이 아니라, 눈을 들어 그분을 바라보는 일이다. 세상의 분주함 속에서 마음이 갈라지고 시선이 흔들릴 때, 우리는 쉽게 롯의 아내처럼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될지도 모른다. 입술로는 따르겠다 하면서, 마음은 세상의 계산 속에 머문다면 우리는 어느새 발을 헛디디고 넘어질지도 모른다. 그래서 다시, 기도로 돌아가야 한다. 거창한 말이 아니라, 화려한 표현이 아니라, 그저 고요히 앉아 말하는 것이다.
“주님, 당신은 여기 계시고, 저도 여기 있습니다.” 그 한마디가 우리의 하루를 바꾸고, 우리의 삶을 바로 세워준다. 기도하는 사람은 세상 한가운데 서 있어도 흔들리지 않는다. 이미 가장 안전한 자리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기도하는 이를 외면하지 않으신다. 그분 앞에 자신을 내어놓는 사람을 그분은 반드시 붙드시고 구원의 길로 이끄신다.
오늘, 잠시 멈추어 작은 기도실 하나를 마음 안에 마련해 보면 어떨까. 말이 많지 않아도 된다. 그저 이렇게만 고백해도 충분하. “당신은 여기 계시고, 저도 여기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