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을 외면한 교육개혁은 또 다른 혼란만 초래한다
최근 서울시에서 내놓은 2028·2033·2040 대입 개편안은 미래 역량, 공정성, 교육 기회의 균형이라는 큰 그림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 안을 들여다보면 마치 건물의 설계도만 화려할 뿐, 그 건물을 지을 기술자·예산·자재가 모두 부족한 상태를 떠올리게 한다. 개편안은 방향성이 아니라 실현 가능성과 검증 체계에서 심각한 문제를 드러낸다.
“정시 비율 폐지” ― 학점제 안착의 해법이 아니라 또 다른 사교육 유발 장치
서울시는 고교학점제가 제대로 안착하지 못하는 이유가 ‘정시 비중’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하지만 이는 현장과 동떨어진 분석이다. 예를 들어보자. 서울의 한 일반고에서 학생들은 1학년 때부터 다양한 선택과목을 듣는다. 하지만 학교가 개설할 수 있는 과목은 교사 수와 예산에 따라 제한된다. 한 학생이 “경제 심화” 과목을 듣고 싶어도 학교엔 해당 교사가 없고, 인접 학교 공동교육과정도 매번 정원이 초과 된다. 결국 학생은 자신이 원하는 학업 경로를 포기해야 한다. 이 상황에서 정시 비중을 없애면 어떻게 될까? 학생부 중심 선발이 확대되면, 선택과목 개설이 풍부한 강남권 학교와 그렇지 못한 일반 지역 학교의 격차는 더 벌어진다. 고교학점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 상태에서 정시 비율을 없애는 것은 촘촘한 도로망이 없는 시골 마을에 자율주행차를 먼저 도입하겠다는 것과 같다.
“절대평가 전환” ― 취지는 좋지만, 평가 공정성은 누가 책임지는가
서울시는 상대평가를 폐지하고 완전 절대평가를 도입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절대평가 체제가 한국의 교육환경에서 안정적으로 작동하려면 최소한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교사 평가 전문성,전국 공통 성취기준의 정교함,외부 검증 기관 구축,문제는 이 세 가지가 그 어디에서도 충분히 준비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구체적 사례를 생각해보자. 서울의 한 학교에서는 ‘문학’ A등급 비율이 60%에 달하지만, 다른 구의 학교에서는 동일 과목 A등급이 25%에 불과하다. 수업 내용·평가 난이도가 학교마다 다르고, 교사의 평가 방식 또한 크게 다르기 때문이다. 절대평가가 실시되면 이 격차는 더 커질 것이다. 그런데 서울시는 '센터를 만들어 전문성을 강화하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지금도 전국시도교육청연합 학력평가센터, 교육과정평가원, 각 시도 평가 담당 부서가 있음에도 학교별 평가 신뢰성은 여전히 불안정하다. 센터 하나가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는 주장은 지나치게 단순한 낙관이다.
“2033년부터 논·서술형 50% 이상” ― 교사 수, 채점 시간, 평가 훈련은 어디서 마련하나
논·서술형 평가 확대는 교육적으로 의미 있지만, 현실은 매우 다르다. 예를 들어, 한 고등학교에서 1학년 전체 300명이 있다면 한 명의 국어교사는 기말평가에서 6~8문항의 서술형 답안을 300명 × 문항 수만큼 채점해야 한다. 문항이 6개라면 최소 1800개, 8개라면 2400개다. 채점 기준(루브릭)을 만드는 데만 하루가 걸리고, 채점은 정확도를 유지하려면 2회 이상 해야 한다. 결국 실제로는 평가 기간 동안 채점을 위해 주말까지 학교에 남아야 한다는 뜻이다. 이미 많은 교사들이 현실적으로 감당하기 어렵다고 호소하고 있다. 그런데 서울시는 논·서술형 50% 이상을 전면 도입하겠다고 한다. 교사 1인당 수업 시수는 그대로, 행정업무 부담은 여전한데 논·서술형 평가 비율만 높이면 어떻게 될까? 결국 “형식적 서술형”과 “기계적 채점”이라는 부작용이 생기고, 공교육 내 평가 신뢰도는 오히려 떨어진다.

“수능 폐지” ― 대학은 무엇으로 학생을 평가할 것인가
2040년부터 수능을 폐지하고 고교학점제 학점 기반으로 대입을 운영하겠다는 구상은 그 자체로는 이상적일 수 있다. 그러나 대학들은 현실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학교마다 절대평가 기준이 다르면, 동일 학점이라도 수준 차이를 어떻게 보정할 것인가? 선택과목의 난이도 차이는 누가 통제할 것인가? 공교육의 격차가 오히려 대입에서 증폭되지 않을까? 실제로 미국 고등학교에서도 내신 절대평가가 일반적이지만, 그 때문에 SAT·ACT 같은 표준화 시험의 의존도가 여전히 높다. 왜냐하면 대학은 표준화된 지표 없이 학생을 판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수능 폐지론은 마치 “교통사고가 많으니 신호등을 없애자”는 주장과 같다. 문제의 원인은 신호등이 아니라 교통체계, 도로환경, 운전자 교육인데, 단순히 ‘시험 폐지’만으로 해결될 리 없다.
“자사고·외고·국제고 일반고 전환” ― 서열화 해소가 아니라 선택권 축소로 이어질 가능성
서울시는 고교 서열화를 해소하기 위해 자사고·외고·국제고를 일반고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서울 서부지역의 A중학교를 예로 들어보자. 이 학교 학생들이 ‘심화 영어’, ‘에세이 영어’, ‘세계 시민 프로젝트’ 같은 특화 프로그램을 듣고 싶어도 가까운 일반고 중 이를 운영하는 곳은 거의 없다. 외고나 국제고가 폐지되면 학생들은 단순히 ‘경쟁에서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 교육 선택권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다. 실제로 일반고 통폐합과 특목고 폐지 정책을 동시에 추진했던 2010년대 지방 교육청 사례에서, 과목 개설 축소, 교사 전문성 저감,지역 간 교육 격차 확대가 반복된 바 있다. 서열화 해소는 ‘학교의 이름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모든 학교가 양질의 교육을 제공할 수 있도록 투자하는 것으로 달성된다.
“전환학기 도입” ― 중학교 3학년의 또 다른 사교육 시장만 키울 위험
중3, 2학기를 ‘전환학기’로 운영한다는 방안도 현실 검증이 필요하다. 이미 중3 학생들은 고입 자소서, 면접, 특기자 전형 준비를 위해 학원을 다니고 있다. 여기에 전환학기 프로그램이 도입되면 새로운 사교육 시장—예컨대 ‘고교 연계 진로 캠프’, ‘전환학기 대비 논술 특강’—이 추가로 생길 가능성이 높다.
결론: 교육개혁은 방향보다 속도가 아니라, 현실성과 준비가 핵심이다
서울시의 개편안은 비전과 목표의식에서는 의미가 있다. 그러나 현장 인프라, 교원 역량, 평가 신뢰성, 지역 격차, 대학의 현실적 요구라는 핵심 요소가 충분히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급격한 제도 변화를 추진하는 것은 또 다른 혼란을 낳을 뿐이다. 교육개혁은 구호가 아니라 실제 현장에서 작동해야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거대한 청사진이 아니라, 학교 간 격차 해소를 위한 실질적 예산 배분, 교사 평가 역량 강화, 대학과 학교 현장이 함께 설계하는 단계적 개혁, 검증 가능하고 신뢰받는 평가 체계 구축이다. 미래형 대입을 꿈꾸기 전에, 현재의 학교가 감당할 수 있는가를 묻는 것이 교육정책의 출발점이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