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3일 치러진 2026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국어 영역의 고난도 문항이 교육계에서 거센 논란을 낳고 있다. 문제 자체의 어려움이 아니라, 철학적 맥락을 무시한 채 현학적 지문을 기계적으로 조합해 출제한 방식이 비판의 핵심이다.
가장 문제로 지적된 국어 17번 문항은 칸트의 인식론적 논의를 바탕에 두고 인격의 지속성을 다루는 지문을 제시한 뒤, 이어서 마인드 업로딩과 관련된 갑과 을의 견해를 비교하도록 요구했다. 포항공대 이충형 교수는 “전공자도 지문 이해에 20분이 걸릴 정도로 문항 구성의 기본 전제부터 어긋나 있다”고 비판했다. 답안으로 제시된 선택지는 지문과 별 관계가 없는 ‘칸트 이전 영혼론’의 관점을 끌어와 현대적 물리주의 관점에 기반한 갑과 을의 견해를 판정하도록 요구했다.
철학사적 맥락을 조금만 알고 있어도 이러한 연결은 성립할 수 없다는 비판이 즉각 제기됐다. 지문 속 갑과 을은 신체·의식·정체성 문제를 물리주의 관점에서 사고하는 현대인의 관점에 서 있다. 반면 칸트 이전의 아우구스티누스, 아퀴나스, 데카르트는 모두 기독교적 영혼론을 전제로 삼는다. 이질적인 두 전통을 단순한 ‘논리 연결 문제’로 취급한 것은 역사·철학·종교적 전통을 제거한 채 단어 맞추기식 사고만을 요구했다는 지적이다.
그럼에도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이의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교육행정의 폐쇄성과 책임 회피 문화가 다시 확인됐다는 비판이 이어진다. 이번 사태는 한 문제의 오류를 넘어 한국 초중고 교육 현실의 구조적 문제를 드러낸다는 지적이 많다.
전문가들은 ‘주입식 교육 폐지’ 같은 비현실적 구호보다, 선택과목으로 밀려난 세계사·윤리와 사상 과목을 필수화해 서구와 비서구 전통을 균형 있게 가르치는 등 세부적 교육정책 전환이 더 현실적이라고 조언한다. 프랑스가 데리다 등 인문학계의 저항을 통해 고교 철학 교육을 지켜낸 사례도 대조적으로 거론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