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납치 사건, 외국의 다양한 시각

1973년 8월 도쿄 한 호텔에서 발생한 김대중 납치 사건은 단순한 정치 탄압 사건을 넘어 한일 외교와 정권 체면의 충돌로 이어졌다. 보스턴에서 발행되는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CSM)는 사건 초기부터 일련의 정세를 면밀히 보도했다. CSM 도쿄 특파원 엘리자베스 폰드 기자는 일본 외무성, 미국 정보망, 한국 정치권 내부를 취재해 당시 양국 정부의 입장을 비교 분석했다.

한국 정부는 김대중 전 의원을 국내 정치의 위협으로 간주하고 장기적으로 사법 처리하거나 정치적 영향력을 무력화시키려 했다. 반면 일본 정부는 주권 침해라는 차원에서 납치에 대한 철저한 수사와 체면 회복을 요구했다. 납치에 가담한 것으로 의심받은 주일한국대사관 외교관 김동운 1등서기관에 대한 일본 경찰의 지문 확보는 한국 정보기관의 연루 정황을 강하게 시사했다.

일본은 김대중의 자유로운 신분 회복과 책임자 처벌, 그리고 재발 방지를 조건으로 한 외교적 합의를 추구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내부 체제 유지와 권위 확보 차원에서 김 씨를 사실상 계속 구금 상태에 두고, 가택연금 해제조차 최종길 교수 고문치사 사건을 물타기하기 위한 의도로 활용했다는 의혹까지 불거졌다.

CSM에 따르면 일본 측은 장기전에 대비하며 외교관 교체와 원조 중단이라는 압박을 이어갔다. 실제로 1973년 11월 기준 일본은 외교 인력 10명을 철수시키고 경제원조 중단이라는 조치를 단행해 실질적 외교적 압박에 돌입했다. 김대중의 출국 허용 여부는 여전히 한국 정부의 재량 하에 있었고, 그의 정치 활동 재개 가능성은 여전히 불투명했다.

CSM은 한국이 과거 서독 유학생 납치사건에서 보였던 방식, 즉 정보기관에 대한 공개적 포상과 인사조치를 이번에도 재현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일본 측은 이런 방식의 “형식적 처벌과 실질적 보상”을 인정하지 않으며, 사건 해결의 조건으로 진정성 있는 사과와 재발 방지를 요구했다.

결국 이 사건은 한 인물의 생명과 자유 문제를 넘어, 박정희 정권의 권위 유지와 일본의 외교적 위신이라는 국가적 이해가 충돌한 외교 전면전이었다. 폰드 기자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과연 누가 체면을 세울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한일 양국의 정치적 계산과 국제적 여론의 흐름을 주시할 것을 제안했다.

이 사건은 냉전기 동북아에서 권위주의 정권과 외교적 명분이 충돌했을 때, 얼마나 복잡한 정치적 균형과 외교적 절충이 필요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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