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의 날 : 믿음과 사랑을 다짐하는 날

‘야! 패스, 패스! 저쪽이 비었잖아!’
‘9번이 6번을 막아야지!’

아직 오전이지만 여름 땡볕이 뜨겁습니다. 먼지가 풀풀 날리는 시골 학교 운동장에서 아이들이 핸드볼 연습에 열중입니다. 6학년 때 나는 도시에서 부임해 온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쳤습니다. 시골 아이들에게 스카우트 활동을 알려 주었고, 돼지 오줌통으로 축구를 하던 우리에게 핸드볼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시골 작은 학교라 운동부 운영 경비가 없어 선생님은 늘 호주머니를 털었습니다. 학교에서는 전교생들로부터 빵을 모아 간식으로 제공해 주기도 했지만 언제나 활동비는 선생님 몫이었습니다.

늦여름의 어느 날 선생님은 손님이 왔다며 오후 연습을 자율로 맡겼습니다. 자율 연습이란 왕복 30킬로미터를 달리는 것입니다. 당시 시골에서는 누에고치가 돈이 되었기에 뽕나무밭이 많았습니다. 반환점을 돌아오는 길에 오디가 지친 우리를 유혹합니다. 슬쩍 따먹은 오디 맛이 감동입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뽕나무밭으로 들어가 오디를 먹다 보니 시간이 4시를 훌쩍 넘어 버렸습니다. 5시가 넘은 시간에 도착한 우리들을 선생님은 교문까지 나와서 기다립니다. 아무 말 없이 쳐다보기만 했지만 입가에 묻은 오디 흔적으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하는 것 같았습니다. 선생님은 주장인 나에게 회초리를 가져오라고 하고 느닷없이 체육복을 무릎까지 걷어 올리고는,

‘내가 너희들을 잘 못 가르쳤구나. 내가 벌을 받으마.’
‘주장, 때려라!’
‘예!?’

나는 귀를 의심했습니다. 우두커니 서 있는 나를 향해 선생님은 재차,

‘뭐 하니? 때리라고 하잖아!?’

농담이 아님을 알면서도 어찌할 줄 모르고 그냥 서 있었습니다. 다시 한번,

‘뭐 해!?’

나는 눈물만 흘릴 뿐 아무 행동도 하지 못했습니다.

‘선생님, 손님 갑니다요!’

멀리서 들려오는 소사 아저씨의 말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습니다. 선생님은 울고 있는 우리들을 향해 모두 무릎 꿇고 반성하라는 말을 남기고는 손님을 배웅하러 갔습니다. 그 일 이후로 우리는 선생님과 더욱 친밀해져 부모님 이상으로 따르게 되었고 연습도 더 열심히 했습니다. 시골이라 방학 동안에는 어린이들이 집안일을 도와야 했지만 선생님의 배려 덕분에 우리는 학교에서 합숙 훈련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내게는 가슴 떨리는 첫 경험이었습니다. 친구들끼리의 식사, 함께 자는 잠 등 모두가 신기하기만 했던 추억입니다.

훈련에 지친 어느날 선생님은 강너머 수박밭으로 우리들을 이끌었습니다. 모두는 웃통을 벗고 진흙을 잔뜩 발라 주인에게 잡히지 않게 무장을 하고 조심조심 수박 서리를 갔습니다. 선생님도 함께였지만 어둠 속에서 주인 몰래 수박을 따는 긴장감과 두려움으로 가슴이 떨렸습니다. 머리보다 큰 수박을 한 통씩 들고 동네 어귀 강물 속에서 깨뜨려 먹었던 그 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알고 보니 선생님은 미리 수박밭 주인과 이야기를 한 후 우리에게는 진짜처럼 서리를 시킨 것입니다. 가슴 떨리던 수박 서리는 지금도 짜릿한 어린 시절 추억으로 남아있습니다.

1983년 나는 교육대학을 졸업하고 발령을 받았습니다. 제자들과 스카우트 활동을 하며 야영도 하고 시골 학교를 찾아다니며 캠핑도 했습니다. 아이들과 겁 없이 함께 했던 애송이 교사 시절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어떻게 그런 일들이 가능했는지 믿어지지 않습니다. 돈키호테 같은 선생님으로 아이들과 어울렸는데 지금은 시대가 변했고 교육 현장도 달라져 감히 상상도 못 할 일들입니다. 미리 주인과 합의하고 아이들을 속이며 즐겼던 수박 서리의 짜릿함 그리고 몇몇 아이들을 기절시키기까지 했던 귀신 놀이는 지금은 그저 아련한 추억으로 기억될 뿐입니다.

88 올림픽으로 전국이 흥분의 도가니에 빠져있던 해, 나는 새로운 도전을 위해 교직을 버리고 미술대학에 입학했습니다. 어릴 적 꾸었던 꿈을 이루기 위해 새로운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교직이 천직이었던지 몇 년 뒤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사립학교에서 다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당시는 중학교 입시가 있었는데 수석을 하면 학생 이름이 교문에 현수막으로 걸리던 시절입니다. 6학년이 되면 저녁 늦게까지 보충수업을 했고, 매일매일 시험 치고 반성하고 시험 치고 반성하면서 1년을 보냅니다. 소풍을 가서도 시험지를 풀고 틀린 문제를 해결해야 했던 그런 6학년이었습니다. 나는 젊다는 이유로 6학년 담임을 배정받았습니다. 당시는 미리내, 이슬 등 순수 한글 이름이 유행했었는데 받아 든 출석부에는 그런 이름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돌림자를 이용한 두 자의 이름만 사용하고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족보를 중요시하는 집안의 자녀들이라 그렇다고 합니다. 같은 하늘 아래,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데 왠지 다른 세상처럼 느껴졌습니다. 열심히 가르쳤지만 늘 성적은 옆 반보다 뒤지고 아이들은 말을 잘 안 들었습니다. 매일매일 가리방으로 긁어 등사기에 한 장씩 밀어내는 시험지 작업도 쉽지 않습니다. 하루를 25시간으로 살아도 좌절만 맛봐야 했습니다. 스승과 제자가 믿음과 사랑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점수와 결과만 있는 전쟁터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스승의 날인 오늘도 아이들은 점수 이야기만 합니다. 올해는 망쳤다는 둥, 담임을 잘 못 만났다는 둥 내 귀에까지 들려오는 불평에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반장! 앞으로 나와!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까지 내가 너희들을 잘못 가르친 것 같다. 내가   벌을 받겠다!”

나는 교실에서 몽둥이를 찾아 반장에게 쥐어 주며 바지를 걷어 올리고

“내가 잘못 가르쳤으니 내가 벌을 받겠다. 반장, 때려라!”

초등학교 시절, 핸드볼을 가르치던 나의 스승님께서

“내가 너희들을 잘못 가르쳤구나! 내가 벌을 받겠다. 주장, 나를 때려라!”

하시던 흉내를 내며 아이들이 반성하기를 내심 바랐습니다. 아이들의 변화를 기대하며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데 ‘쩔썩!’ 소리와 함께 몽둥이가 날아오는 것이 아닙니까? 너무 놀라고 당황했지만 내가 지시하고 내가 정한 터라,

“더 때려! 더!”

나는 결국 7대나 되는 몽둥이찜질을 반장으로부터 당했습니다. 어릴 적 몽둥이를 어정쩡 들고 울고만 있던 내 모습과는 다르게 반장은 울지도 않습니다. 그냥 덤덤하게 나를 때리고는 뚜벅뚜벅 자리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뒷모습을 보면서 배신감이 들었지만 반장 모습이 우리 반 아이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이라 생각하니 허탈하고 슬픔이 앞섰습니다. 어떻게 이 지경이 되었지? 어떻게 여기까지 왔지? 조용한 적막 속에 몇 학생의 작은 어깨 떨림과 조그마한 흐느낌만이 교실을 감쌉니다. 어떻게 종례를 마무리했는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없습니다.

다음 날,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다는 생각에 수업을 마치고 보충수업이 시작될 무렵 아이들 앞에서 걸상을 높이 들고 교탁 앞에 섰습니다. 보충학습을 준비하던 아이들은 잠시 놀랐지만 말리지는 않았습니다.

“내가 너희들을 아무래도 잘못 가르친 것 같다.”

“너희들이 무슨 죄가 있겠니?”

“내가 책임지고 벌을 받겠다.”

작은 웅성임 뒤에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교실은 다시 정적만이 흐릅니다. 10분, 20분, 30분. 내 이마에선 땀이 비 오듯 흐르고 목덜미에는 굵은 핏줄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렇지만 중간에서 그만둘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서 그만두면 아이들에게 지는 것이 될 것만 같았습니다. 정신이 혼미해졌지만 이를 악물고 버티고 참았습니다. 아이들이 다시 웅성대기 시작합니다. 금방 그만둘 줄 알았던 선생님이 30분이 지나고서도 같은 모습이니 겁이 나기 시작했나 봅니다. 다시 5분 정도가 더 흘렀습니다. 이제는 한계까지 와서 더는 버틸 힘이 없습니다. 눈이 충혈되어 핏줄이 터질 지경입니다.

“선생님! 잘못했습니다!”

키 작은 아이가 달려와 내 팔 위의 걸상을 내리려고 애쓰지만 닿지 않아 발만 동동 구르고 있습니다. 웅성거림과 함께 여기저기서 작은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반장이 나와서 내 손에 떨어지다시피 걸려 있는 걸상을 내립니다.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비는 반장을 일으켜 세우다가 나는 정신을 잃었습니다. 아무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땐 밤이었고 병원이었는데 우리 반 아이들 대부분이 내 병실에 와 있었습니다. 그 뒤, 우리 반은 믿음과 행복이 넘치는 학급으로 변했습니다. 서로의 어려움을 터놓고 이야기하고 도움을 요청하며 진심으로 걱정해 줍니다. 6개월이 지난 뒤 반장은 그해 최고의 성적으로 중학교에 들어갔고, 30여 개의 중학교 교문에는 우리 반 아이들이 수석이라는 이름으로 장식이 되었습니다. 우리 반 40명 모두 졸업 여행으로 강원도 바닷가 펜션을 통째로 빌려서 밤을 지새우며 서로의 우정과 헤어짐의 아쉬움을 달랬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지금은 각자의 자리에서 삶을 살고 있겠지만 좀 더 나이가 들면 꼭 찾아올 거라 믿고 있는 잊을 수 없는 사립학교에서의 첫 제자들입니다. 나는 그 뒤 몇 년을 더 돈키호테처럼 근무하다가 내가 있어서는 안 될 곳이라 판단되어 두 번째로 학교를 떠났지만 역시 교직을 못 버리고 지금은 일본 도쿄에서 계속해서 교사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학생과 교사 사이에는 믿음이 필요하며 그 마음을 열기 위해서는 서로가 진심으로 노력해야 합니다. 걸상을 들고 벌을 서며 아이들을 설득했던 시간은 힘들었지만 그 순간 아이들과 나 사이에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아이들과 내가 서로 믿기 시작하면서 우리 반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했습니다. 교사와 학생 사이의 믿음은 단순히 교육의 도구가 아니라 아이들의 삶을 바꾸고 풍요롭게 하며 궁극적으로는 교육의 본질을 실현하는 힘입니다. 오늘날 교육 환경은 여전히 경쟁과 결과 중심적입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교사는 아이들을 믿고 아이들은 선생님의 진심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야 합니다. 교육은 지식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사랑으로 아이들을 이끄는 행위입니다. 지금도 스승의 날이면 어김없이 연락해 오는 제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늘 ‘선생님,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하지만 실은 내가 더 많은 것을 그들로부터 배웠습니다. 아이들에게 믿음을 주고 그들이 신뢰 안에서 성장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스승으로서 더할 나위 없는 행복입니다. 스승의 날의 의미가 단순히 존경을 상기하는 날이 아니라 믿음과 사랑을 다짐하는 날이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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