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가지지 않는 나라에서 맞은 두 번째 밤
“영국이라….”
비행기 창문 밖으로 회색빛 하늘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부터 가슴이 이상하게 뛰었다. 어릴 적 역사책에서 보았던 나라. 한때는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 불리며 세계를 호령했던 대영제국. ‘도대체 어떤 나라일까?’ 런던 공항에 발을 내딛는 순간까지도 나는 마치 영화 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빅벤, 신사모자, 셜록 홈즈, 빨간 2층 버스, 안개 낀 템스강…. 머릿속에는 이런 이미지들이 가득했다.
하지만 막상 도착한 영국은 내 상상과는 꽤 달랐다. 화려하고 거대한 제국의 느낌보다는 오래된 역사책 냄새가 나는 나라였다. 그런데 또 이상하게도 그 오래됨 속에서 묵직한 품격 같은 것이 느껴졌다. “아… 이 나라가 정말 세계를 움직였던 나라구나.” 괜히 혼자 중얼거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무엇보다 놀라웠던 것은 자연이었다. 잉글랜드 쪽은 산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끝없이 펼쳐진 평원과 초록빛 들판. 마치 누군가 거대한 융단을 끝도 없이 펼쳐 놓은 것 같았다. 버스를 타고 이동하던 중 나는 창문에 얼굴을 거의 붙이다시피 하며 밖을 구경했다. “와… 진짜 깨끗하다.” 옆에 앉아 있던 현지인이 웃으며 말했다. “First time in England?” “예스! 처음입니다.” “영국 시골은 아주 조용하죠.” 정말 그랬다. 너무 조용해서 오히려 낯설 정도였다.
더 신기한 건 동물들이었다. 토끼며 고슴도치며 이름 모를 작은 동물들이 사람을 무서워하지도 않고 슬쩍슬쩍 나타났다 사라졌다. 마치 “여긴 원래 우리 동네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홈스테이 아주머니가 사과를 하나 건네주며 말했다. “먹어 보세요.” “씻어야 하지 않나요?” “그냥 먹어도 돼요.” “네?” “괜찮아요. 다들 그냥 먹어요.”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대로 한입 베어 물었다. 아삭! 순간 괜히 감동했다. ‘영국 사람들은 과일까지도 자연 그대로 먹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도시 곳곳의 공원들도 참 인상적이었다. 공원이라기보다는 커다란 숲 같았다. 수백 년은 되어 보이는 나무들, 잘 정돈된 잔디, 오래된 벤치…. 그 안에는 역사가 그대로 살아 숨 쉬는 듯했다.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이건 공원이 아니라 왕실 정원이잖아….” 그런데 며칠 지내다 보니 또 다른 영국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겉보기에는 여유롭고 품위 있어 보였지만, 실제로는 국민 개개인이 짊어져야 하는 부담이 꽤 컸다. 어느 날 담배를 사러 갔다가 가격을 듣고 깜짝 놀랐다. “얼마라고요?” “4파운드 조금 넘어요.(1파운드는 1500원 정도)” “담배가 이렇게 비싸요?” “세금이 많거든요.” 나중에 알아보니 담배값 대부분이 세금이었다.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라가 유지되는 데는 다 이유가 있구나….’

공원에 앉아 있던 노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는 또 다른 현실을 보게 되었다. “자녀들과 같이 안 사세요?” “거의 따로 살지.” “외롭지 않으세요?” 노인은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익숙해지면 괜찮아. 하지만 늙는 건 걱정이지.” 그는 나지막이 말했다. “몸이 더 불편해지면 care-house에 가야 해.” “거긴 어떤 곳인가요?” “돈이 많으면 괜찮지.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쉽지 않아.” 순간 그의 웃음 뒤에 숨은 외로움이 보였다. 나는 문득 생각했다. ‘선진국이라고 해서 모든 사람이 행복한 것은 아니구나.’ 거리에서 홈레스들을 보았을 때도 적잖은 충격이었다. 세계 최강국이었던 나라의 한복판에서 종이컵을 들고 앉아 있는 사람들…. 부자 나라에도 아픔은 있었다. 다만 그 아픔을 조용히 견디고 있을 뿐이었다.
그날 저녁, 조금 무거운 마음으로 홈스테이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거실 문을 열자마자 갑자기 눈이 번쩍 뜨였다. “어? 이거… 대우 TV 아니에요?” “응? 이거 한국 제품인가요?” “저쪽 비디오도 한국 건데요?” “그래요? 아주 잘 만들었어요.” 한국와 대우를 연결시키지 못하는 주인을 보면서 이상한 느낌도 들었지만 괜히 어깨가 으쓱해져서 잘 설명해주었다. 멀고 먼 영국 땅에서 한국 제품을 보니 마치 고향 친구를 만난 기분이었다. ‘대우 탱크 주의!’ ‘우리 나라가 여기까지 왔구나….’
그날 밤, 작은 동네를 한 바퀴 둘러본 뒤 숙소 침대에 누웠다. 처음 꿈꾸었던 대영제국은 아니었다. 그러나 오히려 그래서 더 진짜 같았다. 화려함 뒤의 외로움도 있었고, 역사 속의 자부심도 있었고, 사람 사는 냄새도 있었다. 나는 천장을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인생 사는 건 한국이나 영국이나 결국 비슷한 건가….”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아닐 것이다. 세상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넓고, 사람들의 삶도 제각각 다를거야.’ 낯선 영국의 밤공기가 창문 틈으로 조용히 스며들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설렘과 놀라움 그리고 조금은 복잡한 생각들을 안은 채 대영제국에서의 두 번째 밤 잠을 청했다.
(영국 유학기-4에서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