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년 11월 15일, 이상협이 발행권이 취소된 《시대일보》를 인수해 제호를 바꾼 《중외일보》가 서울 명치정(현 명동)에서 창간됐다. 발행과 편집을 겸한 이상협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서 편집국장을 지낸 언론인이었으며, 자금은 백연기가 수만 원을 투자해 마련됐다. 당시 구독료가 월 1원이던 상황에서 《중외일보》는 60전이라는 저가 전략을 내세우며 ‘최량·최렴’을 슬로건으로 내걸었으나, 재정난으로 일간 발행조차 어려웠다.
창간사에서 이 신문은 “대중의 충실한 동무”를 자임하며 민족의 대동단결을 호소했다. 1928년에는 중국의 배일운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설을 게재했다가 조선총독부로부터 무기한 발행정지 처분을 받기도 했다. 같은 해 해제 후 다시 발간을 이어갔지만, 잦은 압수와 검열은 신문 운영에 치명적이었다.
1929년부터는 조간과 석간을 나누어 발행하며 시사만화·질의응답·가정 상담 등을 강화해 독자 친화적 편집을 시도했다. 그러나 지속적인 재정 압박 속에서 같은 해 마산의 기업인 안희제가 출자, 주식회사 체제로 개편하며 새로운 도약을 모색했다. 안희제가 사장, 이상협이 부사장, 민태원이 편집국장을 맡으며 혁신을 꾀했으나, 결국 일제의 탄압과 경영난을 극복하지 못하고 1931년 9월 2일 주주총회에서 해산 결정을 내리고 자진 폐간했다.
《중외일보》는 짧은 생애 동안 민족 언론의 진로를 개척하고자 했으나, 총독부의 압박과 현실적 한계를 넘지 못한 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대중의 권익을 대변하려 했던 의지와 시대적 실험은 한국 언론사에서 중요한 의미로 남아 있다.